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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02. 2017

소설가 황정은이 말하는 '아무도 아닌' 이들의 오늘

                            


바람이 분다. 코끝에 느껴지는 추위가 매섭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단순히 좀 추운 계절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추위를, 그리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적인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사람들. 힘을 쥔 소수로부터 '아무도 아닌'이라는 수식어로 불린 적이 더 많았을 사람들. 너무 평범해서, 혹은 너무 흔해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이들에게 손수 이름을 붙여주고 입술을 그려 넣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설가 황정은이다.

 
"머리를 좀 빗어도 될까요? 일찍 도착해서 좀 놀다가 뛰어왔더니…."


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수줍게 빗을 꺼냈다. 조심스러운 빗질에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황정은 작가의 사진이 대체로 무심한 표정이었던 터라 내심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그녀는 대화하는 내내 자주 웃었고, 그 모습이 수줍음 많은 소녀 같기도 했다. 일종의 작은 반전이 있었다고 한다면 작고 마른 체구에서 나오는 허스키한 목소리 정도?


솔직히 말하면 황정은 작가와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터뷰는 애초부터 실패를 담보한 것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오랜 팬이기 때문이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를 호불호의 기준에서 ‘불호’의 자리에 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황정은 작가는 세 번째 소설집 <아무도 아닌>(문학동네/ 2016년)을 펴냈다. 그녀가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써낸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이중 ‘上行’은 2013년 젊은작가상, '상류엔 맹금류'는 2014년 젊은작가상 대상, '누가'는 2014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이다.


<아무도 아닌>은 평범한 이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가난의 문제를 비롯해 계약직 노동자, 층간 소음, 가족의 죽음과 실종, 옛 연인과의 추억, 치매 노인, 감정노동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황정은 작가는 잔인한 세계로부터 겪는 상실감, 허무함, 박탈감, 수치심, 모욕감 등을 특유의 담담한 문장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신파로 흐르지 않는 서늘한 시선이 인물들의 비애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구심점 잃지 않은 단편들... "세계 자체가 꾸준히 난폭했기 때문"


"이번 소설집의 제목은 수록작 '명실'에서 가져왔어요. '아무도 아닌, 명실'에서 앞부분만을 옮긴 것이죠. 사람들이 '아무도 아닌'을 자꾸 '아무것도 아닌'으로 읽더라고요. 이 일이 저에게 뭔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끔 했어요. 그래서 '명실' 이후에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제목에 묶일 수 있는 소설을 썼고요. 이번 소설집 수록작 중에서 제일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명실'이에요. 이유는 음, 그냥 좋아요.(웃음) 쓰면서 굉장히 즐거웠거든요. 반면 '명실' 이후의 소설들은 심정적으로 좀 어두운 상태에서 썼어요.


저를 압도하는 화자도 있었고요. 이를테면 '복경'의 화자가 그랬죠. 소설을 쓰는 내내 제게 얼굴을 바짝 내밀고 압도적인 목소리를 내는 듯했거든요. 쓰면서 많이 무서웠을 정도로요. 예전에는 소설 속 화자가 꿈에 등장할 때도 있었어요. 전작 <야만적인 앨리스씨>에 등장하는 화자 '애자'가 그랬죠. 꿈에서 어떤 여자가 대단히 난폭하고 강렬하게 이야기를 쏟아붓는데 '애자'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잠에서 깨자마자 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었고, 소설 속에서는 복숭아 술로 유명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로 삽입됐어요."


황정은 작가는 자신을 인물들의 이야기에 일방적으로 두드려맞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말이 어딘가 모르게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는데, 이 표현은 분명 이번 소설집과도 맥을 같이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아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폭력적인 세계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잃고 방 안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인물(‘웃는 남자’), 한 소녀의 실종을 목격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양의 미래’), 과거 연인과의 기억을 곱씹는 인물(‘상류엔 맹금류’), 층간 소음으로 인해 신경과민 증상을 일으키는 인물(‘누가’) 등이 그렇다. 상실감으로 무력해진 노인 화자를 등장시킨 점 역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최근 제 소설 속에서 노인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을 하는데, 특별히 의도했던 건 아니에요. 아마도 제가 이 사회에 모종의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소설을 쓸 때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고 어떤 이야기를 처음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에 몰입했거든요. 또 저의 재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예전보다 마음이 무거운 채로 소설을 쓸 때가 많아요. 아무래도 현실의 어떤 지점들로부터 직접적인 자극을 받아서인 것 같아요."


황정은 작가는 '명실'을 쓰기 이전만 해도 소설 속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 인물이 조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했다. 그러나 '명실' 이후에는 인물이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게 됐다. 아버지가 모자로 변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을 때, 과거에는 소설 속에 그 상황만 던져놓았던 반면, 지금은 왜 모자로 변했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소설가 황정은이 말하는 '아무도 아닌' 이들의 오늘]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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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윤효정(북DB 객원기자)

사진 : 신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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