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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03. 2017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란다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03년)


허무주의자가 낙천주의자보다 불안에 시달릴 가능성이 적다.


어차피 아무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nihil, 無) 불안할 게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허무주의자야말로 낙천주의자가 될 소질이 풍부하다. 아무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새삼 걱정과 불안, 비관 등으로 스스로를 소진할 이유가 없을 테니. 나는 낙천주의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허무주의의 차디찬 검열을 받지 않은 낙천주의야말로 허공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비현실적이다. 허무라는 불모의 땅에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인간과 생에 대해 긍정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끝내 분투한 이들을 사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리고 로맹 가리.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밑도 끝도 없이 "사랑해야 한다."이다. 이 책을 20여 년 전 처음 읽었을 때도, 10여 년 전 두 번째로 읽었을 때도 이 문장이 대체 왜 여기 들어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낙천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얼치기 허무주의자였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사랑은 그래도 연정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모양인데, 이 책 어디에도 연정 비슷한 것은 티끌만큼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앞의 생>은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열 살 (사실은 열네 살) 소년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파리에 사는 이방인이다. 흥미롭게도 이 이방인들은 서로에게 또한 이방인이다. 모모는 아랍인, 로자 아줌마는 유대인. 그래서 로자 아줌마는 라마단 기간에 자기만 배부르게 먹고 합당한 이유로 (?) 모모를 굶긴다. 배고픈 모모는 거리에 나가 음식을 훔친다.


이방인의 풀이는 이렇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풀이는 이처럼 단순하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단순할 수도, 순탄할 수도 없다. 토박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데도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토박이들에게 ‘우리’라는 말 한마디 듣기 힘들고, 설령 듣는다 해도 스스로 믿기 힘들어한다. 정착과 방황, 인정과 무시,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하는 이방인의 삶은 한마디로, 불안하다!


그런 이방인의 삶이 현대인의 삶과 닮지 않았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며 정규직이든 프리랜서든 수십 년 동안 열정을 바친 일터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 나라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마저 이방인의 심정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이마저 잃어버릴까봐 두렵다. 이미 버림받았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버림받을까봐 두렵다. 끝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외톨이가 되버릴까봐 두렵다. 


두려움은 불안을 가르친다. 또한 이 문장은 패러독스다. "나는 겁이 났지만 내가 그 이유를 잘 알기 때문에 괜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숨을 쉬듯이 항상 이유도 없이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p.121) 이유 없이 겁먹고 있다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괜찮다는 소린데 이런 상태가 정말로 괜찮은가, 아닌가. 하지만 로자 아줌마가 말했다.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란다."


그녀는 조상 대대로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가짜 증명서를 여럿 만들었고 악몽을 꿀 때마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7층 계단을 내려가 더럽기 그지없는 지하실에 은신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알 리 없는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지하실에 보물을 숨겨두고 도둑이 들까봐 잠을 설쳐가며 불안해하는 줄 안다. 그녀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라고 털어놓았을 때 모모가 물었다. "뭐가 무서운데요?" 그녀가 답한다.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모모가 덧붙인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무섭다고 하면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유를 묻는다. 그 표정을 곧이곧대로 믿고 속을 털어놓았다간 정신이 나약해서 극복하지 못하는 거란 말이나 듣고 말 거다. 이유가 있든 없든, 설령 이유가 있고 그게 무엇이든, 똑같은 결론을 내려줄 거다. 정신이 나약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거라고. 그러나 정말 나약한 겁쟁이라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까. 나는 모모의 이 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p.108)


두려움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것을 앞에 두었을 때 극도로 팽창한다. 귀신이나 낯선 사람만 정체불명일까.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올 미래야말로 가장 두려운 정체불명의 대상이다.


두려움은 불안을 가르친다. 오로지 이 순간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불안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화과정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동물의 먹잇감이 되거나 (심지어 배고픈 사람에게 먹혔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인간 무리의 공격을 받아죽고, 식량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굶어 죽고, 변화하는 기후에 대비하지 못해 얼어 죽었으리라.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은 덕에 지금 이 순간은 불안 없이 태평하게 보냈을지 몰라도 후손은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밀 할아버지가 모모에게 들려준 말은 전적으로 옳다. 두려워할 거 없다는 말도, 걱정할 거 없다는 말도, 다 얄팍한 속임수다. 두려움과 걱정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어 비록 낙천적인 즐거움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려놓을지 몰라도 앞을 조심스럽게 살펴 재난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믿을만한 동맹군이다.


이제 이해한다. 마지막 문장이 왜 "사랑해야 한다."인지. 로자 아줌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모는 무서웠다.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나는 밤이 무서웠고, 아줌마 없이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나 겁이 났다."(p.83) 이 얼마나 절절한 사랑 고백인가. 앞으로 살아갈 날에 더 이상 그 (녀) 가 없을지 모른다는 불시의 깨달음만큼 자신의 온 존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한 불안은 슬픈 확신을 부둥켜안고 온다. "나는 벌써부터 내게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p.252)


혼자 될 것이 두려워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둬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로맹 가리는 그런 류의 범인이 아니라 끝내 이런 문장으로 가슴을 뜨끈하게 덥혀놓는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p.307) 세 번째 읽었을 때 이 마지막 문장이 한참 앞서 나왔던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p.43)


현대인이라는 이방인은 상대에게 아무것도, 아무도 없지만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현재를 예견이라도 한 듯 로맹 가리는 자전적 소설 <흰 개>(마음산책, 2012년) 에 이렇게 써두었다.


"세버그와 살면서 나도 이런 순진함을 갖게 됐다. 질 줄 알면서 이기는 데 필요한 순진함 말이다. 내 말은 인간을 계속 믿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을 계속 믿고 신뢰하는 것이 인간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조롱당하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샘이 마르는 걸 보는 것보다 쓰라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 성스러운 샘에 수세기 동안 악의에 찬 짐승들이 물을 먹으러 오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 샘을 잃는 것이 자기 자신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순수함이 아닌 순진함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에 주목하라. 로맹 가리로 말할 것 같으면 순진함과 거리가 먼 사내였다. 그는 한평생 인간이 가진 모든 조건을 우습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계속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과 믿음, 질 줄 알면서 이기는 데 필요한 순진함이다. 허무주의의 차디찬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낙천주의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교차로에 서서 고개만 두리번거린다.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란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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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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