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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05. 2017

운명의 그 집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위치나 채광, 단열이나 수압 같은 기본적인 부분들만 따져도 원하는 집을 구하기 힘든 판에 나에겐 인테리어 욕심까지 있었다. 이미 전세난의 모진 따귀를 맞았기 때문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을 꿈꿀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의 심미안에 큰 쇼크를 주는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무엇을 고를 때건, 기능보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집을 보러 다닐 무렵은 한창 셀프 인테리어 붐이 일던 시기였다. 인터넷 블로그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자신의 집을 환골탈태시켰다. 보다 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집을 볼 때마다 조심스레 너무 마음에 안 차는 부분들, 예를 들어 벽지나 싱크대 따위를 직접 손보고 살아도 되느냐고 물었지만 많은 집주인들이 꺼렸다. 이따금 시뻘건 왕꽃 벽지를 가리키며 집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 요번에 새로 도배한 건데 왜?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꽃무늬잖아"하고 말하면 안타까워 가슴이 턱 막혔다. 기왕 새로 할 것을 도대체 왜 재앙의 왕꽃 벽지로 하신 거예요. 그냥 하얗게만 하셔도 됐잖아요, 네?

내가 영 집을 고르지 못하자 중개인이 야금야금 내 예산보다 더 비싼 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예산보다 훌쩍 비싼 집을 보러 가자고 하기에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할 집인데 공연히 마음에 들면 속만 쓰리지 않겠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굳이 나를 잡아끌고 찾아갔다. 확실히 지금껏 봐오던 집들보단 한결 쾌적했다.

내가 조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대출을 받는 것은 어떠냐, 부모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어떠냐, 반전세도 생각해봐라 등등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거의 포기 직전의 마음이 되어, 울적한 마음을 품고 퇴근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 한 몸 누일 방 한 칸이 없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부동산에 들렀다. "뭐 새로운 매물 없어요?" 하는데 바로 몇 시간 전에 나온 전셋집이 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부동산이 아닌 저 멀찍한 동네의 다른 부동산에 나온 매물인데 부동산끼리의 네트워크로 알게 된 듯했다. 무기력한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도 없이 새 매물을 찾아 걸어갔다.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그 집은 조용한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너무 으슥하지도, 너무 번화하지도 않은 평범한 골목. 골목 어귀에서 저쪽 부동산 중개인 아주머니를 만나 다 함께 그 집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리니 젊은 부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자그마한 부엌 겸 거실에는 짐이 빼곡했다. 부부에게 중개인이 이런저런 것을 물어도 우리의 말을 잘 이해 못하길래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들은 재일교포 남편과 일본인 아내였다. 그러고 보니 이 다닥다닥한 분위기는 다소 일본풍 같기도 했다. 분리형 원룸이라 방도 따로 한 칸 있다고 했다. 문을 열었는데 어라, 생각보다 방이 컸다. 방 한 켠엔 운동을 목적으로 산 듯한 사이클 머신이 있었는데 빨래가 널려 있었다. 아아, 이런 진득한 생활감! 이상하게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촉이 왔다’고나 할까? 여기다, 여기야.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었다.

"이 집, 제가 수리해도 되나요? 벽이나 문에 페인트칠을 한다거나…… 싱크대에 시트지 공사를 한다거나…… 집주인이 싫어하실까요?"

부동산 아주머니는 명쾌하게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가 이쁘게 꾸미고 살면 집주인은 박수 치고 좋아하지."
"그럼 이 집, 제가 할게요."
"근데 아가씨, 집을 시꺼멓게 칠할 건 아니지?"
"시꺼멓게요? 그렇게 칠하는 사람도 있나요?"
"혹시 몰라서 물어봤어. 호호호."

※ 본 칼럼은 책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운명의 그 집]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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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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