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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27. 2016

전 대법관 <김영란>의 서가

"문자가 없던 시대의 상상력이 문자가 발명된 이후의 상상력과 달랐듯, 영상의 시대인 21세기의 상상력이 이전 시대와 달리 발현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문자의 시대와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한 내 경우에는 상상력이란 2차원의 문자에서 솟아나는 다차원적인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책이란 늘 일상을 뛰어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책을 통하여 넘나드는 시공간은 역사적, 지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축적해온 정신적 공간으로의 여행도 가능하게 해준다. 탈것을 타고 가서 경험하는 물리적 공간은 단지 상상력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확인시켜주는 데 불과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상상한 만큼 보인다’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의 1910년대와 1930년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들을 읽는 것도 물리적 접근만으로는 알 수 없는 아프리카의 비밀을 엿보고 스스로 상상해보기 위해서였다."




1930년대의 아프리카에서 길을 찾지 못한 채 유럽으로 돌아간 소녀들은 그곳에 눌러앉았거나 다시 돌아와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렇다면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가 철폐된 이후의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쿳시의 <추락>에 등장하는 20대 중반의 여성 ‘루시’가 그들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루시는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농장에서 혼자 산다. 대학교수이던 아버지는 제자와의 성추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딸의 집으로 온다. 스스로 ‘개조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아버지는 피해자 가족을 만나 사과를 하면서 수치를 자신의 존재 상황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루시는 세 명의 흑인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하지만 마을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려 한다.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워야 한다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여러 계층과 세대의 모습,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엇갈리는 장면을 냉정하게 펼쳐 보이는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마사 퀘스트>는 독자를 1930년대 아프리카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의 한 시골 마을로 데려다준다. 그곳에는 영국 보수단체의 신문을 구독하는 영국 국 교회 교인인 부모와 살고 있는 15세 소녀가 있다.

아프리카에 사는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원래 주민인 흑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문명인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먼저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이나 유대인들과도 다르게 자리매김한다. 식민 사회에서는 타자화와 배제가 다른 사회보다 더 뚜렷할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소녀는 배제의 여러 단계를 거친 섬 속에 머무르면서 육지에 오르는 길을 이리저리 탐색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도 소녀는 아직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배제의 물길이 워낙 깊고 사나워서일 것이다. 많은 성장소설이 그 끝에 이르러서는 방향성을 드러내게 마련인데도, 이 소설 속의 소녀에게는 여전히 어떤 길도 암시되지 않는다. 





 도리스 레싱과 비슷한 시대에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교외에서 태어난 나딘 고디머도 마사 퀘스트처럼 영국인 사택을 벗어나 홀로 길을 걷는다. 그곳은 ‘추하고 책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인’ 낯선 곳이다.

영국 중상류층 아이들의 평범한 가정생활을 그린 동화를 읽는 소녀에게는 동화의 세계 자체가 충분히 색달라서 개구리로 변한 왕자나 과자로 된 집 같은 것을 굳이 상상해볼 필요가 없다. 대도시로 나온 뒤 겪는 세계도, 다시 돌아간 어린 시절의 주택단지도 낯설기는 매일반이다. 흑인 구역에서 총에 맞는 흑인을 보면서 세상 모두에 대한 비현실감을 느낀 그녀는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하면서, 환멸을 끝보다는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돌아올 것을 확신한다.

도리스 레싱이 영국에 머문 것과 달리 나딘 고디머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알리는 길을 걷는 바, 비슷한 성장소설의 마지막이 달라진 지점에서 서로 다른 그 이후를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카렌 블릭센은 28세이던 1913년 케냐 나이로비로 가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다 46세이던 1931년 덴마크로 돌아갔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보다는 동명의 영화로 더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였고 그 2세대는 다시 이중의 배제를 경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영화에서 그려진 카렌과 데니스의 사랑 이야기에도 유럽인들의 배제의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만, 카렌 블릭센의 책 속에서는 누구도 타자화되거나 배제되지 않은 채 온전히 아프리카를 품고 있다. 그녀는 원주민들은 백인이 잘해주든 못해주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자연현상 가운데 하나이기라도 하듯이, 마치 우리가 날씨이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좋아하거나 존경한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아프리카를 보는 시각이 곧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란  ㅣ  1956년 부산 출생.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부터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부산지방법원, 수원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일했으며,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수원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서울지방법원,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2004년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사회 정의에 큰 영향을 미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입법에 힘썼다. 2013년부터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공저)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가 있다. 청조근정훈장, 한국여성지도자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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