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로 태어나 어린 시절 집에서 혼자 놀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미 언니 오빠는 고등학생이었고, 부모님 모두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 시절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아무도 없는 집의 마루다. 신기하게도 우리 집엔 동화책이 한 권도 없었다. 사십대 후반의 부부와 고등학생 자녀를 둘 둔 집에 세 들어 사는 느낌이랄까. 여하튼 시간은 많고 놀아주는 사람은 없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간을 때우기 위해 부모님의 책, 언니 오빠의 책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춘원 이광수의 전집이라든지(<무정>이나 <유정>같은 소설은 정말 초등학생에겐 야동처럼 충격적인 그런 내용이었다.) 군협지류의 무협소설들, 읽다가 사람 이름을 외울 수 없어 끊임없이 포기하게 만들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이라든지….
그러던 어느 날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비교한 이 낭만적 역사서는 나에게 ‘상상’하고 ‘꾸며내고 재현하는 이야기 놀이’라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가르쳐주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옛 영웅들의 그 살벌하고 단호한 결기와 이야기가 어린 나를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장래희망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당시 내 심장에 또 하나의 감동으로 자리 잡고 있던 데이빗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향으로 베두윈 족이 되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시 태어나 카이사르의 집필 노예가 되어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기록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되는 것은 싫었다. 그 혼돈의 시절 적극적으로 선두에 서는 것의 두려움을 이미 어린 나는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 후 수많은 역사서와 역사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출발해서 다양한 장르소설들을 읽게 되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설계해 놓은 줄거리를 넘어서 내 마음껏 주체적으로 확장시켜 상상해보는 것에 소설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래서 나에겐 무겁고 진중한 역사이론서도, 현실로부터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너무 멀리 있는 행성의 신나는 모험을 다루고 있는 SF소설도 다 똑같이 느껴진다. 내 상상의 먹거리인 셈이다. 그래서 책이 좋다. 그 소설들의 멋진 위대함에 감사하고 싶어 지금 영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술탄 살라딘>
문학적으로 풍부한 문장들로 가득 찬 이 역사소설은 우리에겐 십자군의 시점으로 가장 익숙한 바로 그 시기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다. 당시 이슬람의 정치적 상황, 하렘의 사악하고 은밀한 음모, 그리고 서구 기독교의 침공으로 흔들리는 독자적인 문화환경안에서 살라딘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움켜쥐게 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다룬 소설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의 화자는 이븐 야쿠브라는 살라딘의 서기! 나름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의 예루살렘은 정말 흥미롭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그 광대한 제국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이후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되고 또 그 후계자는 어떻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찬탈자에 의해 그 다음 운명이 이어지는가를 마치 당시 근위대의 천인장의 시선처럼 아주 가까이에서 때론 그 운명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동방의 상인처럼 냉정하게 바라보며 그 드라마틱한 시기의 유럽과 아시아의 운명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목격자들, 조운선 침몰사건 1
정조 시대 깊은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이 공존하던 시절, 그 희미한 희망을 손에 쥐고 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젊은 학자들.(이라고 쓰고 실은 조선의 셜록과 왓슨이라고 읽는다) 방각본 살인사건부터 목격자들까지 김탁환 작가는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안에서 추리소설로서의 장르적 완성도를 끊임없이 높여가는 탁월한 작가임을 <목격자들>에서도 여전히 드러낸다. 조운선의 침몰과 그를 둘러싼 음모들. 그리고 백성과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문물을 함께 생각하는 젊은 청춘들의 애달픈 싸움들이 이 소설을 숨도 못 쉬고 끝까지 읽게 만든다. 작년 최고의 한국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유년기의 끝
SF소설에 관심을 갖고 시작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권하고 싶은 SF소설의 고전. 어느 날 '오버로드'라는 이름의 외계인이 지구 상공에 나타나고 그들은 지구인들에게 황금시대와도 같은 꿀같은 번영과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뭐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얇은 두께의 소설로 인해 난 아이작 아시모프를 알게 되었고 로버트 하인라인 필립 케이 딕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의 가장 매혹적인 점은 외계와 겪어보지 못한 미래가 배경이지만 결국 바로 지금 당대의 현실을 그 속 깊이 숙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 소설은 정말 강추!
변영주 ㅣ 1966년 출생. 199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목소리’로 처음 영화를 연출했고, 그 후 연작으로 ‘낮은목소리2’ ‘숨결’을 만들었다. 2002년 전경린 작가의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영화 ‘밀애’를 만들었고, 2004년 ‘발레교습소’ 2012년 ‘화차’를 만들었다. 현재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이유>를 영화화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사진 제공 : 서울국제여성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