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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12. 2017

예측 아닌 '독자적 우주'로서의 미래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수많은 SF 작가들이 미래사를 만드는 작업에 매료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어쩌다 미래 배경의 이야기를 쓰다보니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그러다보면 재미가 붙어서 굳이 연결할 필요 없는 세계들을 억지로 묶느라 남은 세월을 낭비하기도 한다. 물론 난 지금 아시모프 선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사의 문제점은 이들에 결국 낡아버린다는 것이다. 20세기 작가들이 상상한 21세기의 모습을 보라. 지금 세계와 닮은 건 하나도 없다. 일단 인터넷을 예언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수백, 수천 년의 미래사를 그리는 작가들은 종종 겨우 수십 년 뒤에 낡아버린 설정을 수정하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일단 과학의 발전 때문에 많은 설정 오류가 드러나게 되고 (아시모프는 오리지널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은하계의 중심에 있다고 기술한 은하제국의 수도 '트랜터'를 이후에 나온 속편에선 허겁지겁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중 가장 은하계 중심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했다. 망할 블랙홀 같으니.) 종종 역사는 예측을 넘어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덕택에 오슨 스콧 카드는 <엔더의 게임>의 개정판에서 냉전 시대에 기반했던 과거의 미래사를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낡은 미래'는 쌓이다보면 결국 그 자체로 레트로적인 매력을 가진 독립적인 세계가 된다. 그러다보면 스팀 펑크 작가들처럼 작정하고 그 낡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고. 결국 장르 세계에서 '미래'라는 단어는 20세기의 순진한 의미를 잃게 된다. 

보통 미래사는 개별 이야기의 배경일 뿐이지만 얼마 전에 <최후 인류가 최초 인류에게>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올라프 스태플든의 은 미래사 자체를 다룬 책이다. 그 야심은 놀랄만하다. 미래의 인류가 20세기 영국소설가의 정신에 개입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책이 다루는 미래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해서 태양계의 마지막 인류가 종말을 맞는 2억 년 뒤에야 끝이 난다. 

지금 와서 보면 이건 완벽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1930년대 비전이다. 우리가 아는 20세기와 전혀 다른 식으로 진행되는 스태플든의 미래사 초반은 정말 민망할 정도로 낡았다. 그건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서구 지식인 남성인 스태플든의 지식의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태플든의 미래에서 여성은 끈질기게 소외되고 비서구권 문명은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로 남는다. 

그 이후의 흐름도 지금의 장르 관점에서 보면 갑갑하다. 스태플든의 책에서 미래의 문명은 이상할 정도로 인공 지능의 개발에 무심하며 우주여행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늦게 시작된다. 특히 2억 년 뒤의 인류가 보통 책 수십 권의 분량을 담을 수 있는 테이프 책을 순진하게 자랑할 때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전자책으로만 나와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스태플든의 미래사는 예언이나 예측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과거의 작가가 자기가 알고 있고 살아온 세계를 재료로 삼아 상상한 독자적이고 광대한 우주이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지구, 금성, 해왕성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멸망과 재건을 거듭하는 인류의 역사는 툭하면 특이점으로 곤두박질치며 산화하는 요새 SF가 주는 경이감과는 다른 종류의 중후한 매력이 있다. 

많은 낡은 설정들, 그러니까 거대한 집단 지성을 이루는 화성인이나, 거대한 바다 밑에 사는 금성인들도 다른 세계에서는 오래 전에 멸종한 고대 종족처럼 아름답다. 무엇보다 20세기 서구 남성이 가진 제한된 재료(작가 자신이 이를 얼마나 장애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로 영원에 도전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이 시도엔 비극적인 장엄함이 있다.

속편, 그러니까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있다. <런던 최후의 사람들>은 미래의 인류와 공존하는 현대 영국인을 다룬 조금 작은 규모의 스핀오프에 해당되는 작품인데, 곧 번역될 것으로 보인다. 스태플든의 최대 걸작인 <스타메이커>는 태양계로 무대를 제한했던 <최후 인류가 최초 인류에게>와는 달리 전우주를 배경으로 전작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비전을 선보인다. 스태플든의 책들이 아서 C. 클라크와 같은 후배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예측 아닌 '독자적 우주'로서의 미래]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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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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