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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12. 2017

시작은 낯설게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부동산의 낡은 테이블 앞에서 마주한 집주인은 세련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옷차림에서도 안경테에서도 어쩐지 부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니, 이건 어쩌면 나의 ‘주인님을 향한 경외감 필터’가 씌워져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등기부등본을 다시 뽑아 확인하고,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보내고, 최종적인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마침내 난생처음 스스로 한 채의 집을 빌린 감격적 순간이었다. 


나는 집주인이 나를 이끌고 새집으로 가 문을 열어주고 잘 살라는 축언을 해주는 과정을 기대했는데(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었던 것인가, 나의 부질없는 환상은!) 그녀는 휴대폰으로 계좌에 돈이 제대로 들어왔는지 흘끗 확인하고는 바람처럼 일어나 부동산 밖에 세워진 자신의 근사한 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응? 이게 끝이라고? 나는 황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 저, 제 열쇠는요?"

"아, 열쇠요? 이사 끝나고 싱크대 서랍에 넣어두라고 했으니까 가보시면 있을 거예요."


나는 머쓱하게 부동산을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나의 집으로 홀로 걸어갔다. 전에 집을 보러 딱 한 번 가봤을 뿐이라 내가 살 집으로 가는 길임에도 낯설디낯설었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가 몇십 분 전까지 남의 집이었던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무방비 상태로 열렸다. 조심스레 들어선 그곳은 가구도, 사람도, 삶의 흔적도 모조리 빠져나간 텅 빈집이었다. 이제 그곳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할 나의 첫 집이었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살며 이사를 몇 차례 경험했지만 그것은 모두 '아이의 이사'에 불과했다. 부모님이 정하신 집에, 부모님이 정하신 날, 부모님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그런 이사. 사다리차가 내 책장 따위를 저 하늘로 올리는 것을 턱 괴고 구경하고, "이거 내 방!" 하고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방을 동생보다 빠르게 점찍고, 낯선 천장이 내는 뚝 뚝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잠이 드는 그런 이사. 모든 것을 남에게 의탁한 이사.


하지만 어른의 이사는 달랐다. 처음으로 내가 집을 고르고, 내 힘으로 값을 치르고, 혼자서 계약까지 마쳤다. 그렇게 마련한 나만의 집에 홀로 들어서는 그 기분은 설레고 흥분될 줄 알았는데 웬걸, 마치 외계행성에 발을 딛는 것 같았다. 빼곡했던 전 세입자의 살림이 빠져나간 나의 집은 전에 보러 왔을 때보다 훨씬 휑해 보이면서도, 크기를 견주어 가늠할 물체들이 전무해 그런지 ‘이렇게 작았나?’ 싶기도 했다. 그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그곳은 삶의 냄새도, 원근도, 온기도 모두 유실된 이상한 공간이었다.


이제 여기가 나의 집이란 말인가? 이 커다란 빈자리가 나의 공간이란 말인가? 신을 신고 들어가야 할지 벗고 들어가야 할지부터 결정이 안 서서 신발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설렘도 흥분도 아닌 묘한 감정이 와락 덮쳐왔다.






* 본 칼럼은 책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시작은 낯설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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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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