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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an 16. 2017

강남순, 크림빵 뺑소니 사건에서 '용서'를 읽다

강남순 작가 인터뷰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기억하는지? 


2015년 1월 10일 새벽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 들고 집에 돌아가던 예비 아빠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는 19일 만에 경찰에 자수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잡히지 않고 자수를 해서 엄청나게 고맙다"라고 말하며 선뜻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해자는 본의로 자수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건 진술에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의 아버지는 다시 분노하게 된다. 


'용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용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다.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는 지의 여부가 그를 용서의 절대적 기준인 걸까? 만약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걸까? <용서에 대하여>(동녘/2017년)는 위에서 언급한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 발단이 되어 나온 책이다.


이 책을 쓴 강남순은 미국 텍사스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다. 성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는 진보적 신학자로도 유명하다. 강 교수는 인문학적 성찰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본 칼럼을 묶은 <정의를 위하여>를 통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엔 <용서에 대하여>란 책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철학적, 신학적 틀 안에서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월 10일 서울 한남동 북파크에서 강남순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예수와 데리다는 다른 용어를 썼지만 유사한 전개하고 있었다"


Q <정의를 위하여>에 이어 <용서에 대하여>까지 지난 해 말에서 올해 초까지 연달아 책을 출간하셨지요. 이번 책은 어떻게 쓰게 되신 건가요?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 터졌을 때 거기에 관련된 칼럼을 썼어요. 그때 출판사 주간님이 그 글을 읽고 ‘용서’라는 주제로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왔어요. 평소 자크 데리다에 대해 강의할 때도 ‘용서’에 관한 내용은 꼭 한 장으로 넣곤 했어요. 이번 기회에 '용서'에 대해 더 집중해서 연구해서 책을 쓰게 되었지요.


Q 지금까지 '용서'를 매우 개인적인 행위라고만 생각해왔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철학자들이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 이토록 깊게 탐구했다는 사실이 새로웠어요. 


용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용서하는 거예요. 한나 아렌트는 용서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봤어요. 용서하지 못할 때는 과거의 감옥 속에 갇혀서 삶을 살아가니까 미래를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없죠. 그래서 한 개인에게도 용서는 참으로 중요한 거예요. 


반면에 데리다는 개인적 관계 속에서보다는 국제적 문제 속에서 용서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작동하는지에 주목했어요. 남아공에서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용서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 같은 구조로 이용되는 것을 경고하고, 용서가 우리가 생각하듯 쉬운 게 아니란 분석을 했죠.
 
Q 책에서도 언급됐지만 우리 국민에게 '용서'라고 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일본 정부는 작년 '화해치유재단'을 통해 110억 원을 출연하고 이걸로 끝이라고 못 박으려 합니다. 소녀상 설치 문제로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고요. 참 복잡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가해자들이 살아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구조를 만든 국가를 상대로 용서를 요구하는 상황이에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비롯한 다양한 집단이 개입되어 있고요. 그렇다면 이건 개인과 국가라고 하는 집단 간의 용서일까요? 아니면 개인과 가해자 간의 용서일까요? 


아시아여성기금(1990년대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됐을 때 일본 정부에서 각국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주도록 추진하기 위해 만든 기구. 1997년 1월 11일 일본 관계자들은 서울에서 피해자 5명에게 위로금 2백만엔과 수상의 편지를 전달했다-기자 주) 문제가 나왔을 때도 개별 피해자 중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요. 그때 기금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의 위치에 적당하지 않은 것처럼 배제가 되고 말았어요.


또, 우리가 일본에게 철저한 잘못 시인을 요구하고, 그런 도덕적 정당성을 요구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도 일관된 기준으로 철저하게 검증해야 해요. 월남전 때 우리 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 양민 학살의 문제나, 광주 항쟁 등 우리 역사 속에서 있었던 문제에도 많은 피해자가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 다 침묵하다가 김학순 할머니 등장 이후 별안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롭게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건 안 되죠. 역사 속에서 용서를 요구할 것과 용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관성 있는 자기 성찰이 필요해요. 


Q 그렇다면 이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이 문제에서 용서해도 된다, 안 된다는 단순한 답을 찾기보다는 용서가 어떻게 차용되고, 남용이 되는지를 먼저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용서한다고 할 때 누가 누굴 용서하는 것일까요? 누가 무엇을 용서하는 것인가요? 용서의 대상인 가해자는 누구이며, 소위 위안부 할머니라고 하는 분들, 그들만이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의 극장'이란 표현을 썼어요. 정치적 공간에서 용서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전제하고 용서가 연기처럼 진행된다는 것이죠. 이것처럼 위안부 문제에서 '용서'가 마치 무대 위에 올라온 것처럼 연기되는 지점을 생각해야 해요.


데리다는 용서에 그 어떤 목적도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요. 어떤 사회가 극도의 차별 구조 속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다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집단적 용서에서처럼 용서에 전제 조건과 목적이 설정될 때가 있어요. 데리다는 이런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해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급진적인 용서를 얘길 하고 있죠.


Q 말씀을 들어 보면 데리다의 논의와 종교가 무척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용서는 조건적 용서예요. 하지만 예수는 "용서를 몇 번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라"라고 답했어요. 한마디로 무한하게 하라는 말이에요.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거든요. 데리다도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했고요. 나는 예수와 데리다가 서로 다른 용어를 쓰지만 굉장히 유사한 전개를 하고 있다고 봐요.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강남순, 크림빵 뺑소니 사건에서 '용서'를 읽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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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주혜진(북DB 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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