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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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2014년)

5년 전 이태원 경리단으로 이사한 이유는 시간이 퇴행한 것 같은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였다. 돈 냄새만 풀풀 풍기는 프랜차이즈가 지긋지긋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곳엔 편의점 말고 아직 없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은 소규모였고 세상에 딱 하나뿐인 곳들이었다. 나는 주인이 직접 내린 커피와 직접 구운 빵을 먹었고, 그들은 늘 그곳에 있었으며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다른 동네에선 사라진 지 오래된 양장점, 지물포, 목공소가 있었고 저녁에 좁은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은 노란색이었으며 어디선가 개가 컹! 커엉~ 하고 저녁의 대기를 울릴 때면 어릴 적 살던 고향의 밤이 떠올랐다. 예측할 수 없는 골목길도 흥미로웠다.

여의도나 직전에 살던 목동과 달리 한 번 들어선 길은 어디로든 통하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거나 전혀 다른 길이 나오는 것이 예사였다. 하지만 이제 이곳이 싫어졌다. 내가 알던 곳들, 알던 사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졌다. 사람 살던 집이 허물어지고 낯선 이들로 북적이는 가게가 들어서고, 얼마 후엔 그 가게가 다른 가게로 바뀌는 것을 2년 넘게 지켜보자니 좀 진력이 난다. 그래서 떠날 예정이다. 무엇이 있는지 알았기에 정착했고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기에 떠난다.

이런 현상이 시작됐을 때 주민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동네 음식점 앞에 줄을 서고 30분 이상 기다리면서까지 먹으려 하는 젊은이들이 미스터리해 보였다. 길이 좁은 탓에 그들은 보행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즈음 주민들이 나누는 이런 대화를 들었다.

한 사람이 문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 음식점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맛있을까?" 내 귀가 쫑긋해졌다. 나 역시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맛이 없진 않은데, 그 정돈 아냐."

먹어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질문한 사람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묻는다. "그럼 양이라도 많겠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뱃심으로 꾹 눌렀다.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질문 받은 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그렇지도 않아."

그들은 아주 진지했고, 나 역시 궁금했던 그 음식점의 인기 비결과 맛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생각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고….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의 키르헨펠트에서 30년 이상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고문학자다. 이런 그가 하던 강의를 중도에 내팽개치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다. 그를 이렇게 만든 건 헌책방에서 만난 포르투갈어로 쓰인 이 구절 하나였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28)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과도 같은 바로 그 나머지, 그레고리우스가 그 나머지의 정체가 궁금해서 떠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으나 늘 도사리고 있던 무의식을 정확히 짚어낸 포르투갈의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에게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쓴 편지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인용한다.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44)

그것은 현실에서 오히려 미덕이다. 자신보다 가족을 비롯한 타인을 더 돌보고, 행복할 때도 마치 타인의 행복인 양 겸손한 사람. 영혼이 떨리는 대로 쫓아다니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동료로서 귀감이라며 칭찬하지 않던가. 그 칭찬 덕분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이런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만족한다는데 굳이 자신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가? 하는 의심을 품는다. 끝까지 모르는 채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으리라. 그러나 삶에는 불시에 닥칠 수 있는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p.455)

이 말은 아마데우의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인 마리아 주앙이 했던 말이었다. 그게 나타나면서 아마데우의 규칙은 무너졌고, 순식간에 다른 일들이 중요해졌다. 그것의 정체는 에스테파니아.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말 그대로 에스테파니아. 아마데우는 그녀를 통해 자신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조르지와의 우정을 포기했다. 아마데우의 삶은 고독 속으로 침잠해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잘 살았는데 그것이 나타나면서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아차리며 인생을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러니 그것이 나타나는 게 좋은가, 끝까지 안 나타나는 게 좋은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며 사는 게 좋은가, 많은 나머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쓰는 것이 좋은가.

그레고리우스는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조르지의 집을 찾아간다. 벽에 루빈스타인과 리히터, 호로비츠, 디누 리파티와 머레이 페라이어, 마리아 주앙 피레스 같은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커다란 사진들이 붙어있고 사진마다 등이 하나씩 달려있어 켤 때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니 이 정도면 지극정성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조명이 없는 방 한 구석에 스타인웨이, 그것도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다. 형이 유산으로 남긴 재산을 모두 털어 산 피아노다. 조르지는 전혀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피아노를 보면서 저 피아노에 어울리는 실력으로 연주하는 일은 없다는 현실만 반복해서 영혼에 각인시켰을 뿐이다. 조르지는 왜 칠 줄도 모르는 최고급 피아노를 사들이고 그토록 많은 피아니스트의 사진을 걸어놓았을까.

"난 내가 그랜드 피아노를 울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길 정말 바랐어. 예를 들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 에스테파니아는 칠 줄 알아. 그녀가 나만을 위해 연주를 한 다음부터 나도 그렇게 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됐어."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가 책에 써두었던 이 문장을 떠올린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279)

아무리 식탐이 많아도 세상의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을 경험 하며 산다는 사실을 설령 깨닫는다 해도 나머지를 다 경험하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해야 할까? 인생은 내가 경험하는 아주 작은 부분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을, 그렇기에 늘 가슴에 품고 열망하는 나머지에 있을지 모른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여기가 인생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멀리 바라보는 그곳에도 내 인생이 있다.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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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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