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
몇 주 전에 작고한 윌리엄 피터 블래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엑소시스트'를 보았다. 나중에 나온 버전 말고 오리지널 극장판. 원작소설을 읽고 보면 나중에 나온 '작가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영화로는 극장판이 딱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도대체 왜 저 악마가 리건을 그렇게 괴롭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엑소시스트'의 악마는 무지 오래되고 센 존재인 거 같다. 그런데 영화 내내 하는 것이라고는 어린 소녀의 몸 속에 들어가 아이와 가족을 괴롭히는 것뿐이다. 이건 동네 깡패들이 할 짓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고대의 존재가 할 일이 아니다. 이어지는 속편들에선 어떻게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래도 별 이치는 안 맞는다.
이게 20세기 이후 오컬트물의 한계이자 매력이다. '엑소시스트'와 같은 작품들 뒤엔 모델이 된 실제 엑소시즘 사건들이 있다. 그걸 어떻게든 현대 가톨릭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이들 작품인 것이고. 일단 일어난 현상이 먼저이니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드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 결과 나오는 건 엄청 현실적인 질감을 갖고 있지만 이치는 안 맞는 영화들이다. 둘 중 하나를 얻으려면 나머지 하나는 그만큼 포기해야 한다.
20세기 이전의 악마들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 존재들이었다. 당시 악마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굳이 사실적인 악마를 만들 생각이 없었으니 그냥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이치에 맞게 잘 놀면 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악마는 일종의 지옥의 세일즈맨 같은 존재였다. 순진무구한 인간 한 명을 꼬셔서 영혼을 사들이면 1점을 딴다. 남들보다 점수가 좋은 악마들은 보너스를 타거나 승진할지도 모른다. 독일의 악마, 프랑스의 악마, 이탈리아의 악마, 아일랜드의 악마는 성격이 조금 다른데, 아무래도 각각 배정받은 지역에서 오래 살다보니 토착민의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어느 정도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악마들이 더 세속적이고 이해심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읽은 이야기에 나오는 악마들 중 가장 독특한 존재가 자크 카조트의 <사랑에 빠진 악마>에 나온다. 아마 가장 매혹적이고 정신사나운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에 카조트가 이 악마를 전형적인 장르 틀에 가두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지 않았다면 더 재미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나폴리 왕실근위대 대위인 알바로라는 스물 다섯 살 스페인 청년이다. 그는 강신술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던 어느 날, 소베라노라는 선배에게 넘어가 오컬트 무리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결국 악마를 부르는 주문을 외우게 되는데, 주문을 듣고 나오는 존재는 거대한 낙타 머리를 한 흉물스러운 악귀이다. 놀란 그는 당장 스페니얼 강아지로 모습을 바꾸라고 명령하고 그 존재는 순순히 그 명령에 따른다. 악마는 그 뒤로 비온데타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하는데, 여기서부터 악마와 알바로는 서로와 사랑에 빠진다.
이 설정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카조트가 변신을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백조로 변하건, 황소로 변하건, 금으로 된 비로 변하건 늘 제우스다. 하지만 카조트의 작품에서 악마는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는 순간 그 정신까지 인간 여자가 되어버린다. 조금 다르게 본다면 지나치게 역할에 충실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배우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시동으로 변장해 알바로를 따라다니게 된 악마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참으로 연속극스러운데, 읽다보면 딱해질 지경이다. 다른 여자와 알바로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에 빠지고, 암살자의 공격을 받아 칼에 찔리고, 정체가 탄로나 주변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그러는 동안 비온데타는 끝도 없이 기절하고 앓고 울고 하소연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18세기 스페인 총각은 이 모든 것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래도 결혼하려면 엄마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카조트는 이 이야기를 안전한 교훈담의 틀 안에서 마무리 지으려 했고, 그러기 위해 이야기에 두 개의 반전을 넣었다. 읽어보면 다 이치에 맞지만, 그래도 앞의 설정이 더 재미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가장 독특한 악마 캐릭터…인간과의 러브스토리]의 일부입니다.
☞ 전문보기
글 : 칼럼니스트 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