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세상에서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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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오정희/ 문학과지성사/ 2009년)


어느 날 아버지가 난데없이 "너는 뭐가 되고 싶으냐?" 물으셨다. 그런데 그때 내 나이 이미 마흔을 한참 넘긴 후였다. 손자에게나 하실 질문을 중년의 딸에게 하시다니 처음엔 잘못 들었는가 했다. 내 눈을 응시하며 재차 물으셨다. "뭐가 되고 싶냐고?"


마지못해 답했다. "지금 작가하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핀잔하듯 이러셨다. "쳇! 너는 꿈도 없냐?" 그러면서 당신은 꿈이 있다고 하셨다. 무슨 꿈이냐고 물으니 꿀 잡순 양 털어놓지 않으셨다.


한 번도 이상이나 꿈같은 거 털어놓은 적이 없다. 무엇이 될지, 될 수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 받은 아버지의 질문은 참으로 자극적이었다. 세상은 마흔 넘은 사람한테서 더 이상 가능성을 찾지 않는다. 현재의 상태를 지금까지의 결과물로 본다. 지금 이 상태에서 그대로 늙을 일만 남은 존재로 바라본다. 모르는 체해도 그런 시선이 이따금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아직도 무엇인 가가 돼가고 있는 진행형으로 보아주셨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나로 결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정할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결정할까.


"세상에서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준 것은 연숙 아줌마다.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 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밤새 고이고 흐르던 세상의 물기가 해가 떠오르면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돼 다시 내려서 땅속 깊이 뿌리 적시는 맑은 물로 흐르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고 말했다. 강물이, 바닷물이 나뭇잎의 향기로 뿜어지고 어느 날의 기쁨과 한숨과 눈물이 먼 훗날의 구름이 되는 거라고도 말했다." (p.75)


시간의 흐름에 밀려 닳아지고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 같아도 내게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것들뿐만 아니다.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고, 듣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던 것들 또한 나라는 사람의 결과 무늬를 만들어간다. 이룬 것만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것도 나를 만든다. 어쩌면 우리 기억 속에 더욱 선명한 것은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이리라.


이루지 못한 꿈은 이루지 못한 대로 나름의 가치를 획득한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삶도 사랑도 예술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쪽에 확신이 선다. 완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고독 하나 아름답다. 꿈꾸는 자의 삶은 어떻게든 꿈의 방향으로 선택되며 나아갈 것이기에.


우리의 삶은, 기억하자!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나를 결정하는 매순간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여생 (餘生) 이란 말은 사전에서 없어져야 할 단어다.


※ 본 연재는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샘터/ 2016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세상에서 한 번 생긴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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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유선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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