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괴상한 의뢰인을 퍼즐 미스터리 트릭에 섞어 내기

by 인터파크 북DB


20170201135147433.jpg '페리 메이슨'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한 레이몬드 버(왼쪽)와 바바라 헤일(오른쪽)(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배우 바바라 헤일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헤일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페리 메이슨'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변호사 페리 메이슨의 비서인 델라 스트리트로 나온 배우라고 말하면 설명이 되려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바바라 헤일은 57년에 시작해서 66년에 끝이 나고 85년에 다시 '콜롬보' 스타일의 텔레비전 영화 연작으로 시작했다가 95년에 진짜 끝을 본 이 장대한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에 나온 유일한 배우였다. 심지어 페리 메이슨 역의 레이몬드 버도 다 나오지는 못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페리 메이슨' 텔레비전 영화는 버의 사망 이후에도 메이슨 없이 다른 변호사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네 편이나 더 나왔기 때문이다.

부고를 접하고 집에 있는 페리 메이슨 소설들을 들추어봤다. 내가 가지고 있는 번역서들은 57년작인 <대담한 유혹>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창기인 1930년대에 쓰여진 것들이다. <페르시아 고양이>, <말더듬이 주교>, <토라진 아가씨>, <유리눈의 사나이> 등등. 페리 메이슨의 창조주인 얼 스탠리 가드너는 70년에 죽을 때까지 꾸준히 페리 메이슨 소설을 썼고 심지어 두 편은 사후에 나왔다. 더 놀라운 건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그가 수많은 필명으로 썼던 작품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이렇게 생산성이 높은 대중작가들을 보면 그냥 부럽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쓰는 버릇이 잘 들 수 있을까?

내가 직접 읽은 건 열 편 안쪽이지만 아마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아는 책들은 더 많을 것이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 나온 에피소드 상당수가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소설을 직접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작을 읽고 싶은가. 그건 잘 모르겠다. 페리 메이슨의 이야기는 어느 매체로 접해도 재미있다. 중요한 건 이야기 자체로, 그 이야기를 담은 매체가 꼭 문학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페리 메이슨 소설은 대부분 같은 공식 안에서 진행된다. 일단 페리 메이슨 사무실에 독특한 개성의 의뢰인이 찾아와 하찮지만 괴상한 의뢰를 한다. 누군가 자기 유리 의안을 훔쳐 누명을 씌울지도 모르니 보호해달라느니, 죽은 고용주의 상속인이 자기 고양이를 싫어하니 도와달라느니... 페리 메이슨은 비서인 델라 스트리트,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는데, 곧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나 그 주변인물이 살인범으로 몰린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법정으로 가고, 페리 메이슨은 배심원들 앞에서 멋지게 이들의 무죄를 입증한 뒤 진범까지 밝힌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1930년대 영어권 추리문학의 유행에서 파생된 작품들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은 당연히 보인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만만치 않은 퍼즐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추리작가로서 가드너의 매력은 괴상한 의뢰인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상황과 소도구를,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퍼즐 미스터리의 트릭에 섞어내는 스타일에 있다.

지금 독자들은 페리 메이슨을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의 변호사이다. 그건 그의 의뢰인이 몽땅 무죄라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 같은 것에 발목이 잡히지 않는다. 메이슨과 동료들은 사생활도 없고, 가족도 없고, 사귀는 사람도 없다. 오로지 일만 아는 영리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30년대부터 60년대 말까지 활동하는 동안 나이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인위적인 완벽함은 매력이기도 하다. 페리 메이슨 소설에는 동시대 하드보일드 작가들이 종종 빠지는 냉소주의나 불쾌함은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다. 퍼즐 미스터리와 법정물로서 논리는 명쾌하고 간결해서 아쉬움도 없다. 언제 읽어도 만족스럽고 즐거운 이상적인 가상세계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느라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페리 메이슨 소설 대부분이 한동안 절판되었었고 2015년에야 복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스트셀러의 덧없음이랄까. 하긴 우리나라에도 정식 출판된 페리 메이슨 소설은 한 편도 없다. 지금 남아있는 번역서들은 모두 저작권에 걸리기 전에 나온 것들이다. 사실 페리 메이슨 소설들이 굳이 다시 번역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읽지 않고 현대 법정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의견은 암만 생각해도 나에겐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괴상한 의뢰인을 퍼즐 미스터리 트릭에 섞어 내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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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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