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쓰레기 전쟁터의 카피라이터

루나파크 : 독립생활의 기록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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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주하는 건물은 나지막한 빌라로 1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일반 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는 건물 현관 옆 지정 장소에 버리는 시스템이고, 음식물 쓰레기는 전용 쓰레기봉투에 담아 동네 곳곳에 있는 공용 수거함에 버리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선량한 주민들에 의해 잘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누군가가 음식물 쓰레기를 자꾸 건물 현관 옆에 무단 투기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원칙적으로 음식물 쓰레기는 버리는 곳이 아니기에, 당연히 쓰레기는 수거되지 않았고 한번 놓여진 음식물 쓰레기는 그곳에서 하릴없이 썩어갔다. 누군가의 상식 없음이 나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경쾌한 출근길은 남이 버려둔 김치 썩는 냄새를 맡으며 시작해야 했다. 신나는 퇴근길엔 수박 껍데기에 몰려든 파리떼를 쫓아야 했다. 나는 우리집 현관을 나서기 전부터, 오늘은 로비 앞에 음식물 쓰레기가 있을지 없을지 상상하느라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두어 달을 끙끙 앓다가, 벽보라도 써서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써보는 건물 벽보에 이 10년차 카피라이터는 긴장했다. 어떤 날카로운 한 문장이 이 사태를 훌륭히 해결할 것인지 책상 앞에서 오래 고민했다. 당연히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그런데 이 문구는 밋밋하고 뭔가 부족해 보였다. 이 정도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거잖아. 고작 이 정도로 고쳐질까?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한 말은 이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당신의 양심에서 악취가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격한 말을 쓰고 나니, 공연히 이것이 상대를 자극해 오히려 태도를 고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이런 인간을 자극하는 것은 옳지 않아.


계속 여기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시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 문구는 허풍이었다. 내가 대관절 무슨 수로 조치를 취하겠는가! 기껏해야 집주인에게 푸념하는 게 전부겠지. 이런 허풍이 그런 뻔뻔한 사람에게 통하겠느냔 말이다.

그렇게 나는 쓸데없는 직업병적 고민만 하다가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외출하면서 보니 어떤 용자가 나보다 앞서 벽보를 써서 붙여뒀다! 대충 연습장을 쭉 찢어 휘갈긴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여기 음식 버리면 건물에 바퀴벌레 생김.


와우, 브라보!


내가 며칠 생각한 메시지보다 훨씬 심플하고 위협적이고 확고한 메시지였다. 그저 개인적인 불쾌감을 넘어선 '건물에 바퀴벌레가 생긴다'는 위협 소구! 공포 마케팅! 그렇지! 누군지 모를 범인이여, 눈앞의 편의만을 좇다간 당신의 집에도 바퀴벌레가 생길 수 있다고! 우리만 시각적, 후각적 테러를 당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이 벽보를 보고 너무 감탄해서 그 아래 포스트잇으로 '좋아요' 따위의 댓글을 달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 벽보 덕인지 그후로 음식물 쓰레기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일은 없어졌다. 위협은 확실히 통했던 것이다. 카피라이터로서의 내 경력은 이런 문제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 내가 쓸데없이 고뇌하며 문구를 가다듬는 사이, 무심하게 찢은 종이와 시큰둥한 필체로 누군가가 나 대신 해냈다. 그는 과감하고 현명한 이웃이었다. 하지만 이 용자 역시 누군지 알 방법이 없어 감사를 표할 길이 없었다.


* 본 칼럼은 책 <혼자일 것 행복할 것>의 본문 일부를 편집한 글입니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쓰레기 전쟁터의 카피라이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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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홍인혜(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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