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파크 북DB Mar 06. 2017

이이화 “말 바꾸는 지배세력, 19세기에서 안 변했다”

<민란의 시대> 저자 이이화 인터뷰

                 



“19세기 조선 역사를 공부해보면 오늘날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팔순의 원로 역사학자의 눈은 늘 현재를 향해 있었다. 19세기 조선 민중들 이야기를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늘 현재로 돌아와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맺곤 했다.


2월 14일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만났다. 10년에 걸쳐 완성한 한국통사 <한국사 이야기>(전22권)와 <인물로 보는 한국사>(전10권) 등 방대한 저술을 자랑하는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1937년에 태어난 그는 이제 팔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올 1월에는 또 한 권의 새로운 책 <민란의 시대>(한겨레출판, 2017년)을 세상에 내놓았다.


<민란의 시대>는 학자들에 의해 ‘민란의 시대’로 불리는 19세기 조선의 민중운동사를 정리한 책이다. 관서농민전쟁(홍경래의 난)에서 삼남 농민봉기와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의병항쟁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19세기를 혼란의 과도기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민중의 에너지에 주목해 새롭게 조명했다. 2016년 늦가을부터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촛불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이때, <민란의 시대>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이화 선생의 말에 따르면, 19세기 조선의 민중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한동안 맥이 끊겨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채호, 박은식 등의 학자들이나 사회경제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됐지만, 해방 이후로는 좌파라는 낙인 때문에 연구하는 학자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민중운동사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다. 당시 동학농민전쟁은 ‘동학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민중들의 저항사는 역사 책에 잘 등장하지도 않았다.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음은 당연했고, 연구를 위한 1차사료 역시 부족했다. 이이화 선생은 죄인에 대한 신문 기록인 <추안급구안> <포도청등록> 등을 뒤지며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 선생을 향해 뒤에서 ‘빨갱이’, ‘좌파’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추억했다. 그때부터 여러 학술지와 잡지 등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민란의 시대>는 그렇게 쌓여간 글들을 토대로 탄생한 책이다.




“지배세력의 횡포가 있으면 언제든지 민중은 저항하는 것”


“영조-정조 시대를 탕평의 시대, 실학의 시대라 불러요. 많은 개혁 정책들이 추진됐죠. 그런데 정조가 1800년 승하해요. 그때부터 안동 김씨들의 문벌정치, 개혁을 거부한 반동정치가 시작됐습니다. 벼슬자리 등 모든 것을 독점하고 삼정을 문란케 하는 부정과 수탈을 자행하죠. 언제든지 지배세력의 횡포가 있으면 민중은 저항하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인터뷰는 19세기 조선 민중운동사에 대한 짧은 강의처럼 진행됐다. 이이화 선생은 19세기 초 민중봉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안동 김씨 중심의 문벌정치 아래에서 자행된 수탈체제를 지목했다. 당시의 민중봉기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양반을 죽이자는 살반계(殺班契), 상전을 죽이자는 살주계(殺主契),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자는 살약계(殺掠契) 등 여러 형태의 비밀결사체가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는 불교의 미륵신앙, 주역의 후천개벽사상, 정감록 사상 등으로 무장하고, 계속해서 민중들을 선동하며 동지를 모으고 저항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1811년 관서농민전쟁, 이른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평안도 일대를 석권한 당시 최대 규모의 민란이었다. 관서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민중들은 진주고변, 제주고변, 전주고변 등을 비롯, 숱한 괘서(掛書, 국가에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성문 등에 글을 써붙이는 것) 사건 등을 일으키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세기에는 문화도 달라졌어요. 그림도 진경산수화가 등장하고, 문학도 민중정서를 담은 여항문학이 등장하고, 춘향전과 같은 대중소설들이 나와서 민중의식을 깨운 거예요. 춘향전 읽어보세요. 수령 아들이 어떻게 기생 딸과 결혼해요? 보통 혁명적인 게 아니에요.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니까. 봉산탈춤이나 하회탈춤을 보세요. 탈을 쓰고 양반을 비웃는 사회풍자극이잖아요.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허위의식에 찬 시대가 지나고, 민중들이 달라진 거예요. 이게 민중의식이에요.”


민중의식이 성장하고 크고 작은 민란이 이어질 때, 당시 집권세력들은 무엇을 했을까? 1862년 초 지리산에서 시작해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로 번진 삼남 농민봉기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세력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조세제도인 삼정,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관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봉기가 잠잠해지자 삼정이정청을 폐지하고 만다. 이이화 선생은 이 대목에서 큰 아쉬움을 표했다. 여론이 악화될 때만 국민들의 눈치를 보는 현대의 지배세력들을 이야기하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876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강압에 따라 개항이 이뤄진 이후에는 민란의 성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안동 김씨를 대신한 여흥 민씨 문벌정치가 등장해 부정부패와 수탈체제는 더 극심해졌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은 광산 개발권과 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거머쥐고,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 자원을 빼앗아갔다. 이후 민란에 반외세 운동의 성격이 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이이화 선생이 “19세기 조선 민중운동사의 핵심”이라고 짚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동학이라는 종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 동양에서 하늘은 곧 창조신이에요. 사람이 하늘이라는 것은 남녀, 빈부, 반상의 차별을 모두 없애자는 혁명적인 사상이었죠. 그러니까 민중들이 몰려드는 거죠. 문벌정치에서 소외된 지식인 계층도 가담했고요. 그리고 이때 반봉건 투쟁과 함께 반외세 투쟁이 결부된 거예요. 민중운동과 민족운동의 결합,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이죠.”


이이화 선생은 “우리 민중이 이렇게 전국적인 규모의 항쟁을 벌인 적이 5천 년 역사에 없어요”라며, 동학농민전쟁을 “민중의 에너지가 분출”된 일대 사건으로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일본군이 한쪽으로는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한쪽으로는 농민군을 토벌하고 나선 것. 민중의 열망이 아무리 높아도 서양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1910년 의병항쟁 진압까지, 우리 민중에 대한 일본군의 제노사이드가 자행됐다.




“촛불시민혁명, 민주적 가치 실현하는 새로운 세상 열어가야”


1895년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이후에는 민란의 양상이 또 한 번 변화한다. 유림들이 반외세 투쟁인 의병항쟁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의병은 농민군 세력을 배척했다. 조선 왕조를 지키기 위한 의병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에 저항한 농민군 역시 그들의 원수이기 때문이었다. 의병항쟁은 이후 연합전선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고 농민군 세력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반봉건-반외세 투쟁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의병항쟁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막지 못했다. 1910년 일본은 위로는 조정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행정조직을 장악하고, 밑으로는 민중운동을 모두 토벌한 바탕 위에서 전쟁 한 번 하지도 않고 한반도를 집어삼킨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민란의 시대’는 그렇게 비극으로 마무리됐다.


19세기 조선의 민중운동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며 역사적 의미가 퇴색됐다. 하지만 이이화 선생은 당시의 민중운동이 “근대를 열어가는 기본동력”으로 “기존 양반 사회를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19세기 저항운동이 남긴 민중의식은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항쟁 등 이후의 저항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양반 없잖아요. 일본에도 왕이 있고 영국에도 왕이 있고, 아직도 왕이나 귀족이 있는 나라가 많아요. 우리는 양반이 족보에만 있어요. 민중의식의 전통 위에서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적 가치를 만든 거잖아요. 대신 요즘은 학벌이나 변형된 자본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것 역시 우리 민중의식의 전통 위에서 앞으로 깨어나가야 하는 것이죠.”


이이화 선생은 ‘민주적 가치의 실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민란의 시대>를 통해서도 단순히 ‘그때 민란이 많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만 배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들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지금의 왜곡된 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란의 시대>를 읽으며, 기자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은 이름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이 아니라 ‘이두황’이란 이름이다.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급 공로를 세운 사람. 민비 시해사건 때는 광화문 경비를 맡아 '일본 측에' 공을 세웠다.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돌아와 일제강점기에 전라 관찰사와 전북 장관을 역임했다. 죽고 나서는 전라 감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기린봉 명당 땅에 일본식 묘를 썼다. 지금도 그의 묘는 전주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것은,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이제 세상이 다 안다는 것이다. 이이화 선생은 우리의 친일 청산에 미흡한 점이 많지만 민주적 가치의 확장을 통해 역사문제, 민족문제도 바로잡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들이 모두 세상에 떳떳하게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언급하며, “민주사회가 될수록 이들은 역사에서 배척당하고 사라질 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민주주의 문제와 민족문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새 대통령 제1 주문은 ‘평화’... 무기만 사들인다고 안보가 되나”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적인 촛불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요즈음, 이이화 선생은 그것을 ‘촛불시민혁명’이라고 불렀다. 시민의 힘으로 부정한 권력을 심판하는 지금을 새로운 ‘민란의 시대’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민란의 시대>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상당히 시의적절하다. 이이화 선생도 책의 머리말에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19세기 민중운동사는 분명히 오늘날의 거울이 될 것”이라고 썼다.


“19세기 조선의 개벽사상, 미륵사상은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사상이에요. 오늘날 촛불시위도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이 말이죠. 대통령을 감옥에 넣으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촛불시위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분단, 차별, 억압, 부정부패, 갑질, 비정규직 등 오늘날의 새로운 모순들을 청산하는 것이 민주적 가치의 실현이고, 촛불은 그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해요.”


동시에 이이화 선생은 촛불시민혁명이 과거 ‘미완의 혁명’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4.19혁명, 6월민주항쟁 등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들 모두 ‘미완의 혁명’으로 그쳤다는 말이다.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새로운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성공한 혁명’으로 마무해야 한다는 것. 오늘날의 촛불시민혁명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에 따라서 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라 말했다.


지금까지도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한-일 ‘위안부’ 합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와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이화 선생은 올해 결정될 새 대통령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의 ‘제1 주문’은 바로 평화였다. 그는 남북이 통일 안 하고 따로 따로 잘 살면 좋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한 국가, 한 민족이 나뉘어 살면 반드시 경쟁하게 되고 대립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는 현재 남북 간 전투를 중지하고 있는 불완전한 정전협정(停戰協定)을 넘어,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는 평화협정까지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남북화해와 평화, 그게 제1 주문이에요. 금강산 관광 재개하고, 개성공단 문 열고, 핵은 핵대로 해결하고. 미국 무기만 사들인다고 안보가 되는 줄 알아요? 평화운동 하고 남북회담 하는 게 더 중요한 안보예요. 북-미 간에도 정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으로 가야 돼요. 우리가 (평화협정을) 분명히 주장해야 되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빨갱이라 그럴까봐, 대선 주자들도 표 떨어질까봐 함부로 말 못하고요. 남북문제가 제일 중요해요.”

이이화 선생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책 쓰는 것도 예전처럼 안 돼요”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이었다. 3년 계획으로 여섯 권짜리 청소년을 위한 역사 이야기 책을 집필 중이라면서, “설민석 못지않게 재미있을 거예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활동 하나.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는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과거청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50억 원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진행 중인데 현재까지 30억 원이 모였다고 한다.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이화 선생은 시민들의 힘으로 올해 안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취재 : 최규화(북DB 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 인터파크도서 북DB www.book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s://www.facebook.com/bookdb/


매거진의 이전글 임경선 "내 책 읽으면서 기지개 켜는 느낌 받았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