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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pr 19. 2017

명랑소설가 정세랑 “입구의 풍선 같은 작가 되고파”

저자 정세랑 인터뷰 


사립 M고의 보건교사인 ‘안은영’은 보통의 보건교사가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 즉 엑토플라즘(영적 에너지가 물질적 매질을 통해 구체화된 것 혹은 그런 물질)을 감지하고 퇴치하는 퇴마사이자 심령술사다. 악귀와 혼령을 다루는 그녀이지만 음침함이나 어두움과는 거리가 멀다. 통굽 슬리퍼를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고, 자신의 무기인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를 막아내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명랑하고 유쾌하게.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아홉 번째 책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가 정세랑이 지난 2015년 12월 출간한 판타지 소설이다. ‘본격 학원 명랑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사립 M고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상한 일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주인공 안은영에게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이라는 무기가 있었다면, 정세랑 작가에게는 명랑함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는 무기가 있다. 밝고 유쾌한 이야기로 한국 문학계에 실험적인 변화구를 던져보고 싶었다는 정세랑 작가를 만났다. 기분 좋은 대화 속에 진중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동안, 소설이 정세랑 작가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명랑성은 한국 문학계에 던진 실험적 변화구”


Q ‘본격 명랑 미스터리 학원물’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작가의 말’에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 즐겁게 쓴 이야기라 영원히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큰 애정이 느껴진 작품인데, 어떻게 쓰게 된 소설인가요?


단편으로 시작된 작품이에요. 소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사랑해 젤리피쉬’를 썼는데 SNS를 통해서독자분들이 더 읽고 싶다고 의견을 많이 남겨주셨어요. 장편이어야 할 것 같다고요.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마구 던져주시기도 했고요.(웃음) ‘원어민 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체육 선생님도 넣어달라’, ‘전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요구들이요. 더 빨리 완성하고 싶었는데 몇 년 걸렸네요.


Q 주인공인 ‘안은영’은 퇴마사이자 심령술사예요. 그런데 그 퇴마의식이 굉장히 독특해요.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사용해서 무찌르고, 사람들의 마음이 깃든 사물이나 장소에 가서 기를 충전하기도 하고요. 심각하게 풀 수 있는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많이 돌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비극적인 동화의 결말은 직접 수정해 읽었다고 들었는데, 그런 성향이 반영된 걸까요?


아마도 국내 소설가들 중에서 제가 가장 밝은 것 같아요.(웃음) 일단은 한국 문학계에 가벼운 공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탄산음료처럼. 그런 갈증에 대한 실험이죠. 이 소설이 가장 처음 발표된 지면이 지금은 사라진 <세계의 문학>(1976년 창간, 2015년 종간된 민음사의 계간 문학지)이었거든요. 가볍고 밝고 장르적인 이야기를 이 문학계에 던졌을 때 어떻게 받아낼까? 이런 변화구를 던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실까. 그런 호기심이 있어요. 일종의 실험이었던 거죠. 유연함을 노리고 가볍게 쓴 면도 있어요. 평소에 그런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Q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긴 소설이에요. 그 이야기를 관통하는 ‘안은영’과 ‘홍인표’라는 주요 인물이 있고요. 각 에피소드를 통해 역사 교과서, 동성애 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데요, 소설의 분위기 덕분인지 이 문제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접근이 가능했어요. 의도하신 부분인가요?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람들이 소화하기 쉽도록 가볍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회과학 서적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잖아요. 사실 이런 문제들이 나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들인데 그걸 너무 거창하거나 무겁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최대한 가볍게,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Q 남들과는 다른 존재를 보고 느끼는 은영이나 어릴 적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인표처럼, 이 소설에는 결핍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해요. 중요한 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태도인데요. ‘극복해 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능동성이 굉장히 좋았더라고요.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각자의 한계, 각자의 단점, 각자의 결핍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으면서도 그걸 다 안고도 친절한 사람이 좋더라고요. 주변에 그런 분들을 보며 감탄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 단계 성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을 담은 캐릭터들인 거죠.


Q ‘작가의 말’에도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대부분을 지인을 참고해서 설정했다고 밝히셨죠?


네.(웃음) 주변 사람들의 특징이나 이름을 넣으면 캐릭터에 이상한 리얼리티가 생겨요. 그리고 그렇게 쓰는 걸 좋아하고요. 제가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왔는데, 시부야역에 있는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편 건물에서 내려다 보다가 ‘저 모습이 내가 소설에서 그려내고 싶었던 거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길을 걷는 게 정말 아름다워 보였어요. 서로가 서로의 삶에 교차되고 이런 모습들이요.

보통 사람들의 이름, 주변에 있을법한 사람들을 소설 속에 끌어오는 작업이 너무 좋아요. 하지만 소설은 사실 현실에 비교하면 아주 부족한 묘사에 가깝죠. 옛날 청동기 시절의 거울처럼 울퉁불퉁한 거울에 불과할 수밖에 없어요. 현실을 비추는 것에 한계가 있는 거죠. 그래서 주변에 더 귀 기울이고 끄집어내려고 하고 수집하고 싶어요. 특히 판타지일수록 더 그래요. 이상한 일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웃음)


Q 개인적으로는 놀이터에 머물러 있는 영혼 ‘정현’과 죽은 뒤 은영을 찾아온 중학교 동창 ‘강선’의 이야기가 많이 슬펐어요. 두 에피소드는 유난히 여운이 길더라고요.


강선이 이야기 쓰면서 저도 많이 울었어요. 독자 리뷰를 보는데 실제로 형제를 잃은 독자분들께서 그 에피소드를 읽고 많이 우셨다고 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강선의 에피소드에도 잠깐 언급이 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이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이 아프고요. 이 사회가 사람을 얼마나 쥐어짜고 있는지, 결코 그들에게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에피소드예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Q 안은영의 직업은 보건교사예요. 여러 의미로 타인을 ‘치유’하고 돕는 그녀의 역할과 맞닿아 있는 설정이 아닌가 싶은데요.


안은영과 홍인표의 직업이 보건교사, 한문교사잖아요. 국영수 중심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여유로운 직업처럼 여겨지고, 크게 바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보건교사가 없는 학교가 얼마나 위험한 학교예요? 한문 역시 교양의 세계이고요. 바로 가치로 전환될 수 있는 것들만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실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안전하게 해주고, 때로는 방어막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제 역할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져서요. 다른 면에서는 제 친한 친구가 간호사라서 캐릭터 설정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요. (웃음)


Q 무엇보다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주인공 안은영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잖아요. 작가님 SNS를 보니 페미니즘, 자연, 동물과 관련된 글이 많았는데 이런 관심사가 작품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안은영은 작가님께 특별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여성 중심의 서사! 제가 이 작품으로 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예요. 바로 캐치해주시는군요.(웃음) 은영은 뛰어다니고 무찌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자기 일에 자부심도 있는 여성 캐릭터예요. 보통의 경우, 많은 작품에서 소명의식은 주로 남성 주인공에게만 주어졌거든요. 그런데 그걸 여자 주인공에게 주고 싶었어요. 여성이 더 이상 도구로 활용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대신 메시지를 너무 강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가볍고 부드럽게 작품 속에 숨겨두는 게 저의 방식이에요. 공기처럼요. 조금 다른 말인데, 저는 이 작품에 대한 남성 독자분들의 반응을 보고 어떤 희망을 느꼈어요. 여성 독자분들 역시 저의 든든한 지원군이지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은영에 대한 남성 독자분들의 지지와 응원이 저로서는 많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Q 사람들의 마음이 깃든 사물이나 장소에서 은영이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잖아요. 좋은 마음에 좋은 기운이 깃든다는 설정들 속에서 작가님이 이 사회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느껴지더라고요.


사람들이 보조배터리냐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저는 간절히 뭔가를 원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많은 힘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연말연초에 백화점 같은 곳에 소원 카드 달린 나무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몰래 읽어보는 걸 되게 좋아해요. (웃음) 저 같은 경우는 지난 수년 동안 생일케이크에 촛불을 불면서 ‘좋은 글 쓰게 해주세요’, ‘작가가 되기 해주세요’, ‘책 내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었거든요.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은 소원 같은 게 정말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요. ‘언령’ 같은 거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걸 쉽사리 가질 수 없는 힘든 상황이지만 ‘나 망했어!’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생각보다 되게 중요하거든요.


Q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서 <이만큼 가까이>에서 역시 작은 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의 성장기를 담아냈고요. 주로 성장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도가 높으신 것 같아요.


저도 굉장히 힘든 10~20대를 보냈어요.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무서웠고요. 사회 경기가 나빠지거나 업계가 힘들다거나… 이런 상황을 개인으로서는 어쩌지 못하잖아요. 거기에 나약하게 던져진 나이이기 때문에 더 힘을 주고 싶은가 봐요. 그 성장기에 딱딱한 벽을 마주하면 다칠 수도 있고 꺾일 수도 있고 사람이 변할 수도 있잖아요.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 벽을 넘을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쉬운 낙관은 무책임하니까, 힘든 와중에도 길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원하는 길은 아닐지 몰라도 길은 반드시 있을 거라는 걸.




Q 작가님 작품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밀집된 특수 장소들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해요.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학교, 최근작 <피프티 피플>에는 병원이 배경이 되는 것처럼요. 이런 장소 설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피프티 피플>과 <보건교사 안은영>은 집필 시기가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아요. 2014년에서 2016년 사이인데요. 그 시기에 ‘내가 발 디딘 곳이 무너지고 있다’라는 무의식이 있던 것 같아요. 구해야 할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절망이 굉장히 크게 다가왔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잡아주고 받쳐줘야 하는 장소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어요.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곳, 서로를 구할 수 있고 구해야 하는 장소에. 학교도 사실은 밝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이지만, 굉장한 억압의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한 사회의 축소판이죠. 너무 익숙해져서 당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억압. 공기 같은 억압과 공기 같은 폭력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집필을 하기 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저도 쓰고난 후에 깨달은 거예요. ‘내 나름대로 절망을 소화해내는 방식이구나’라는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요.


Q ‘가벼운 공기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보건교사 안은영>이 독자에게, 국내 문학계에 어떤 환기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마치 안은영이 홍인표의 손을 잡으며 충전을 하듯 가벼운 충전을 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복잡한 생각이나 어려운 고민을 함께 해주는 책은 이미 다른 작가분들이 많이 쓰시니까요. 저는 보다 가볍고 편한 작가가 되길 원해요. 다른 작가들에게 가기 전, 그들에게로 나아가는 ‘입구의 풍선’처럼 만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소설에 너무 무겁고 권위적인 것만 남아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더 즐거운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팟캐스트 [생활밀착형 전방위 문화토크 286](이하 문화토크 286)과 [북DB]가 함께하는 콜라보레이션. 두 번째 책은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입니다. 정세랑 작가의 인터뷰 뒷이야기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4월 21일(금요일) [문화토크 286]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글  : 임인영(북DB 기자)

사진 : 임준형(러브모멘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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