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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pr 20. 2017

최영미가 복원한 70년대"허기와 독기는 같은 부엌에서"

저자 최영미 인터뷰 


속았다. 막연히 차가울 거라고, 그냥 까칠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영미 시인을 만나기 전에 긴장을 좀 했다. 전날 저녁엔 이발도 하고, 당일에는 평소에 잘 안 입는 정장 재킷도 꺼내 입었다.


4월 5일 서울 서교동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차도녀’는 어디 가고, 내 앞에는 “누구든지 5분 안에 웃길 수 있다”고 장담하는 “농담박사”가 앉아 있었다. “간만에 하는 인터뷰”라 최영미 시인도 긴장을 좀 했나 보다. 하나뿐인 정장구두도 신고, 팬이 만들어줘서 가장 아낀다는 가방도 들고 나왔다. 서로의 긴장을 확인하면서 서로의 긴장은 풀어졌다.


최영미 시인이 쓴 첫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2005년 초판)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기억의 전등이 반짝 켜졌다가 깜빡 꺼지는 것을 반복하는 느낌의 소설. 138개의 이야기 마디로 이뤄진 이 소설은 그 반짝임과 깜빡임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소설과 에세이, 시를 넘나든다. 전쟁의 시대, 폭력의 시대, 빈곤의 시대, 왜곡된 풍요의 시대로 이어지는 우리의 현대사. “오래된 고통” 속에 살아온 주인공 정하경의 이야기와 함께 “허기와 욕망”으로 상징되는 지난 시대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 두 가지 죽음의 트라우마가 하나로 화해해가는 과정이 밀도 높게 그려졌다.


최영미 시인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주인공이다. 1994년 출간돼 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하지만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최영미 시인에게 가장 밝은 빛이자, 가장 깊은 그늘일지도 모르겠다. 최영미 시인은 “작가는 책만 쓰면 된다”는 생각으로 “은둔 아닌 은둔”의 20여 년을 보냈다. 지난해 이른바 ‘근로장려금’ 뉴스가 크게 회자가 됐던 까닭도, 스스로 선택한 소외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 아닐까.


한 시간 30분 남짓 최영미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러 번 놀랐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니.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니. 최영미 시인 역시 <흉터와 무늬>의 주인공처럼 “오래된 고통”을 “잘게 부수어 발설”하고 있는 것 같았다.


Q 1988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 또 2005년에 책으로 나온 것을 이번에 개정판으로 내면서 다시 한번 고쳐 쓰는 과정도 있었고요. 멀게는 30여 년 전, 가깝게는 12년 전 쓴 원고를 다시 보는 감회가 어땠는지 먼저 듣고 싶습니다.


첫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게 1988년이고요, 그때부터 2005년까지 썼다 말았다 한 거죠. 이 책이 절판됐는데, 가끔 독자들이 찾으시더라고요. 독자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제가 공들여 쓴 흔적이 없어지는 게 좀 아깝더라고요. 다시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작년 가을에 11년 만에 처음 본 거예요. 다시 보기가 징그러웠어요. 처음 쓴 소설이라서, 내가 쓴 것 같지도 않아요.(웃음)


Q 소설은 138개의 이야기 마디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장 짧은 마디는 겨우 두 문장으로 돼 있고. 그냥 한 편의 시로 읽어도 무방한 이야기 마디들도 여럿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분량이 원고지 2000매 정도로 엄청 많았어요. 시인이 처음 쓴 소설이다 보니까, 글의 밀도를 조정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어떤 마디는 친절하게 늘려서 설명하고, 어떤 마디는 아주 압축적으로 전달한 경우도 있어요. 언니와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강한 감정을 전달할 때, 고통과 관계된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할 때 평이하게 문장을 쓰면 전달이 잘 안 되잖아요.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도 밀도의 차이를 준 것 같아요.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의식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를 달래는 절차를 우리는 생락했다. 꽃도 촛불도 없었다. 우리는 언니를 매장하지 못했다. 독한 향이라도 피우고 식구끼리 얼싸안고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음을 쏟았다면 지금쯤 언니는 희미해졌을 텐데.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지 못했다.(304쪽)





“가장 힘들게, 가장 오랫동안 매달린 책... 나의 피와 같은 문장들”


Q 138편의 이야기 마디들이 책에 실린 순서와 각각이 집필된 순서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쓴 마디가 어떤 것인가요?


33번째 마디예요. 세검정의 풍경을 그리고 ‘울 밑에 선 봉선화’ 노래가 나오는 마디. 원래 이 소설 제목도 (그 노래 가사 중에서 따온) “아름답게 꽃필 적에”였어요. 사실 제가 세검정에 살았어요. 70년대 서울 세검정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소설의 맨 마지막 138번째 마디를 초기에 먼저 썼어요. “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나는 사랑하고 싸웠다.”(401쪽) 또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 중에 1988년이 있어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와서 언니에 대한 기억을 캐내기 시작하는 그때의 이야기도 초기에 먼저 썼어요.


아주 긴 시간 동안 쓴 원고들이라 책을 내기 위해 구성하는 작업이 어마어마했어요. 책으로 내고 나서 가장 좋았던 것은 책상이 깨끗해진 것.(웃음) 근 20년간 모은 원고와 쪽지들이 정말 많았을 거 아니에요. 보물찾기 하듯이 다 찾아서 정리한 거죠. 10년 전에 쓴 이야기를 모르고 또 쓰기도 하고.(웃음) 이 책을 탈고할 때의 기쁨은 ‘이제 죽어도 좋다’ 할 정도였어요.


Q 이 소설을 정하경이라는 주인공의 성장소설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 성장소설이죠. 그리고 저는 70년대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을 통과했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고속성장을 하면서 갑자기 풍요로워졌어요. 제가 소설 속에도 두 문장으로 요약해놨잖아요. “굶주림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살찌기를 걱정해 다이어트를 했지. 내게 70년대와 80년대의 삶은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두 개의 연대가 하나로 연결된 시기를 우리가 관통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136쪽) 70년대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글을 쓰는 동력 중 하나였어요.


Q 주인공과 가족들이 건너온 한 시대를 보며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저는 ‘주인집’이라는 단어가 그 시절 가난한 도시민들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 같았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70년대는 어떤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허기’와 ‘욕망’이죠. 소설 속에 보면 반공 웅변대회에서 1등 한 친구가 있어요. 그 당시 웅변대회를 하면 아이들이 막 공산주의니, 애국이니, 독을 품은 말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주인공이 그 친구 집을 가봤더니 주인공보다 더 가난한 거예요. 소녀가장인 그 친구는 쌀이 없어서 도시락도 못 싸와요. 그래서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왔는데, 급우들은 그게 간식인 줄 알고 뺏어먹은 거예요. 걔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그래서 제가 ‘허기와 독기는 같은 부엌에서 나왔다’고 썼어요. 그 허기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질주한 거예요. 그게 욕망이죠.


Q “오래된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아는가? 침묵할 힘이 없으면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106쪽)라는 문장에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담겨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 ‘오래된 고통’의 정체는 아무래도 ‘언니’와 ‘아버지’일 것 같고요. 주인공에게는 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가 있었고, 아버지에게는 한국전쟁 때 살인을 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었죠.


처음에는 탐정소설로 구성할 생각도 있었어요. 주인공이 그 두 개의 죽음의 비밀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말이죠. 아버지는 실수로 부하를 죽였잖아요. 그런 아버지가 첫 번째로 낳은 아이가 잘못됐다는 것. 결국 그 두 개의 죽음은 하나로 섞이죠. 두 문장으로 된 가장 짧은 이야기 마디가 그것이죠. “소설 속에서 하나로 엮인 두 개의 죽음이 의미를 찾아간다. 신호등 앞에 서 있어도 파란불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400쪽) 이 소설의 결론이죠.


Q 그동안 시집, 소설, 산문집 등 10권 이상의 책을 써오셨습니다. 그중에서 <흉터와 무늬>는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의 책인지 묻고 싶습니다.


가장 힘들게 쓴 책. 가장 오랫동안 매달린 책. 저의 피와 같은 문장들이에요.


당신의 몸으로 때운 역사. 신념에 찼던 반공주의자가 반공의 현대사에서 거세된 역설을 이해하며 나는 아버지와 화해했다. 우리는, 아버지와 딸은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빨갱이를 때려잡는 게 일생의 목표였던 아버지. 빨개지려다 분홍으로 비껴났으나, 때로 단순한 빨강보다 더 피 흘린 나.


시대가 다르고 깃발만 바뀌었지 아버지와 딸은 같은 궤도를 달렸다. 급행열차에 몸을 싣고 안전장치 없이 무작정 달린 아비와 딸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둘 다 우산을 쓰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을 대비해 허술한 우산도 준비하지 않고 시대의 광풍을 맨몸으로 맞았다.(320쪽)




“일상화돼 있던 성희롱... 문단 사교계에서 은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


Q 지난해 5월에는 뜻밖의 기사가 났습니다. 작가님이 ‘근로장려금’ 지원 대상이 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거죠.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큰 화제가 되면서 예술인들의 처우와 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여론의 반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놀랐어요. 저는 제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제 소득을 보고 국가에서 장려금을 지원해주겠다고 한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라는 거지?’ 제 모습이 너무 창피해졌어요. 그런 얘기를 SNS에 썼죠. 사람들한테 알려진 제 이미지가 ‘20억 부자’쯤 된대요. 사람들도 상상을 못했겠죠. SNS를 보고 언론사에서 전화들이 오고 기사가 나고 난리가 났죠.


그 뒤로 제 또래들을 만나면 연봉을 물어봤어요. 몇 천만 원씩 된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구나.’ 경제관념이 제가 등단한 90년대에 멈춰 있었던 거예요.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풍요로운 중년을 누리고 있었을 텐데’라고 후회했죠. 피눈물이 나게. 작가로서 열 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아직도 생활이 안정되질 못했잖아요. 물론 저보다 힘든 작가들이 많지만, 나이 들어서 남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가족 안에서도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데 그게 참 벅차다고 할까. 지금도 가능하다면 월급 좀 받아보고 싶어요. 이 얘긴 꼭 써주세요.(웃음)


Q SNS를 통한 소통을 부지런히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흉터와 무늬> ‘작가의 말’에도 SNS에서 만난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고요.


저는 그동안 소통하려는 노력을 너무 안 했어요. 작가는 그냥 책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누구 못지않게 고고한 작가였어요.(웃음) 책이 나와도 기자들이나 평론가들, 다른 작가들한테 안 보냈어요. ‘문단 사교계’에 안 나타난 것도 10년 넘었거든요. 언론에서도 문단에서도 제가 책을 냈다는 걸 모르더라고요. 사람들은 제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한 권만 낸 줄 아시더라고요. 어느 순간 아무도 저를 안 찾게 됐죠. 일부러 은둔하겠다고 은둔한 건 아닌데, 제가 잊힌 거죠. 책이라는 건 남과 소통하기 위해 쓰는 건데, 또 한 권 써냈다는 만족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제 동생이, 저 같은 사람이 SNS를 해야 한다고 몇 년 전부터 꼬드기더라고요.(웃음) 저도 위기의식을 느껴서 작년부터 시작했죠. 해보니까, 제 언론이 생긴 거라서 정말 좋았어요. 제 무기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했을까! 저처럼 사람 잘 안 만나는 사람한테 더 필요한 거예요. 지난 20여 년간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저한테 없는 말이었어요. 이제 뒤늦게 철이 든 거죠. 지금은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아요.(웃음)


Q 최근 문단의 큰 이슈들에 대한 의견도 좀 듣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슈는 ‘여성’입니다. 최근 임솔아 시인은 출판계약을 하며 성폭력 관련 조항을 포함시켰고, 서효인 시인은 그의 시 가운데 여성혐오로 읽힐 수 있는 부분들을 고쳐써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런 움직임에 앞서 여러 부정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은 알고 계실 것 같고요.


알려진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죠. 터질 게 터졌다, 잘 터졌다고 생각해요. 제가 문단 사교계에서 은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제가 등단한 90년대에는 성희롱이 일상화돼 있었어요. 제가 당하기도 했고, 직접 보거나 들은 이야기들도 많죠. 선배 여성 문인들이 저한테 경고한 말이 있어요. 술자리에서 어떤 남성 시인 옆에는 앉지 말라고. 어느 해엔가 출판사 송년회 자리에서 그 시인이 옆자리에 앉은 여성 편집자를 희롱하고 있었어요. 그걸 계속 보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이 교활한 늙은이!”라고 해버렸어요. 그렇게 나와버렸더니 수습하라고 또 난리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저를 안 부르더라고요.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한 10년간 그 출판사는 저한테 한 번도 시 청탁을 안 했어요. 더 심한 이야기도 있지만 입이 더러워질까봐 말 못하겠어요. 그 전에도 저한테 “애도 안 낳아본 여자가”라고 어쩌고저쩌고한 예술가가 있어서 술자리를 엎고 나온 적도 있고요. 우리 문단은 선배-후배라는 위계도 너무 심하고, 선배 남자 문인은 후배 여성 문인에게 어떤 말이든 해도 된다는 인식들이 있어요. 그런 권력의 문제 때문에 피해자들이 나서지 못한 거예요.


Q 또 하나의 이슈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종말과 함께 그 실체가 드러났는데요, 사태를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블랙리스트에 없어서 너무 서운해요. 여기서도 내가 왕따구나.(웃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한 말이 있어요. “인간을 파괴시키려거든 예술을 파괴시켜라. 가장 졸작(拙作)에 최고 값을 쳐주고, 뛰어난 것을 천하게 하라.” 명언을 했죠. 그 말이 요즘 정말 와닿아요.


Q 2005년 <흉터와 무늬> 초판 이후 2014년에는 장편소설 <청동정원>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혹시 또 출간을 준비 중인 소설 작품이 있나요? 출간이나 집필 계획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써놓은 소설 원고는 없어요. 구상하고 있는 건 있어요. ‘쌈빡한’ 연애소설 하나 쓰고 싶어요.(웃음) 제목도 정해놨어요. ‘그에게’라고. 제 시 중에 ‘그에게’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요. 한 10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건데, 이번 <흉터와 무늬>가 반응이 좋으면 더 의욕이 생길 것 같아요.(웃음)



글 : 최규화(북DB 기자)

사진 : 신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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