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문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밝혀낸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국내 최고의 석학들에게 듣는다. (편집자 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예술과 수학일 겁니다.
문자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대를 흔히 역사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가 출현해서 기록이 남아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죠.
언어는 대략 기원전 10만 년에서 5만 년 사이에 발명되었다고 추정됩니다.
하지만 문자는 기원전 5000년쯤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죠.
그러니까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문자가 없는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같은 출토품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조각품은 기원전 2만3000년경에 만들어졌죠.
문자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가슴과 엉덩이가 상당히 큽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인류의 생존,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다산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풍만한 여성의 조각상을 만들어 다산을 기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기대나 희망을 어떤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는 개념이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이미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전에 이런 예술의 개념이 있었던 것이죠.
수학은 어떻습니까?
이상고 뼛조각(Ishango Bone)이라고 하는 어느 뼛조각에는 특이한 흔적이 있습니다.
대략 기원전 2만5000년 정도 된 이 뼈에는 여러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어떤 셈을 한 것으로 보이죠.
그러니까 이미 저 때부터 셈의 개념이 있었다는 겁니다.
생존의 필요에 따라 셈의 개념이 출현한 것으로 보죠.
겨울을 나기에 충분한 만큼의 사냥감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거죠.
그걸 제대로 못하면, 겨울을 못 나고 죽는 거죠.
결국 셈이라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필요에서 출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듯 예술과 수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둘은 과연 따로 발전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류의 생존, 종족의 보존을 위해
예술과 수학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했습니다.
황금비(golden ratio)라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가장 아름다운 비율이라는 것이죠.
직사각형 안에 정사각형만큼을 빼면, 또 직사각형이 남죠.
거기서 또 정사각형을 빼내고, 남아 있는 직사각형에서 또 정사각형을 빼냅니다.
이때 나타나는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이 비율을 계산하면 1.618 정도 됩니다.
이런 황금비율은 자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태풍의 모습에서 발견되고, 노틸러스(Nautilus)라는 조개에서도 관찰됩니다.
황금비율은 아주 오래전부터 발견됩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의 신전에서도 찾을 수 있죠.
이것은 단순히 수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보기 좋은지에 대한 당시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술과 수학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고대부터 발전해온 것이죠.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타일이 굉장히 발전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사용하는 것이 굉장히 발전했죠.
평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타일링의 분류도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중세의 이슬람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하학이 발달했던 거죠.
수학의 역사를 추상과 실용의 대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우주가 존재합니다. 물리적 우주와 수학적 우주죠.
물리적 우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거기에는 사과가 세 개가 있을 수도 있고, 고양이가 세 마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우주에서는 모두 3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수학적 우주에서는 그냥 3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사과 세 개에서 하나를 먹으면 몇 개가 남을까’라는 질문을 할 때
수학적 우주에서는 3이라는 숫자의 성질을 공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3이라는 숫자의 성질에 따라
사과를 먹거나 고양이 한 마리가 도망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나중에 알게 되죠.
물리적 우주에 초점을 두면,
사과 세 개와 고양이 세 마리, 사람 세 명을 볼 때
모두 각각 별개의 현상으로 다루게 됩니다.
하지만 수학의 세계에선 그것이 3이라는 숫자 안으로 수렴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결과를 모든 현상에 적용할 수 있죠.
물리적 우주를 다루는 것을 실용, 응용, 기술이라 부르고,
바빌로니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반면에 수학적 우주를 추상, 순수, 과학이라 부르고,
그리스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두 세계의 대립과 상호 극복이 수학의 발전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들이
수학적 우주에서는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리적 우주와 수학적 우주 사이의 관계를
저는 기술과 과학, 실용과 추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저는 이 두 개 사이의 대립과 상호 극복 과정을 변증법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라는 저술에서 정반합 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하나의 흐름이 탄생하면 얼마 후 그 흐름에 반하는 것이 탄생하고,
그것들이 서로 대립하고 극복하면서 새로운 합이 출현하죠.
이 합이 어느 순간 새로운 정이 되고, 다시 그에 대한 반이 출현합니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 과정이 이런 정반합의 과정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순수와 추상의 대립과 상호 극복이 수학의 역사라고 본다면,
이는 헤겔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연 : 박형주(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정리 : 휴머니스트 편집부
* 이 원고는 재단법인 카오스에서 2015년 상반기에 진행된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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