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터파크 북DB Jun 17. 2016

빅뱅 이름을 '빅뱅 안티' 학자가 지었다고?

[서평] <기원 the Origin> 

나는 문과다. 고등학교 시절 문·이과 선택과 대학 수험생 시절 전공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항상 확고한 선택을 했다. ’숫자와 기호가 없는 공부’ 쪽으로. 그런 나에게 제 발로 과학 강연을 찾아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지난 4월 ’반(半) 칠십’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과학 대중강연을 들었다. 카오스(KAOS) 재단에서 주최한 특강. 사실 강연이 끝난 뒤 강연자인 정재승·진중권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현장에서 적지 않게 놀랐다. 현장의 분위기가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좌석이 부족해 강연장 뒤쪽에 보조의자를 놓고 앉은 사람이 수두룩했고, 질의응답 시간에 나오는 청중들의 질문도 수준이 높았다.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왜 이렇게 많이 왔을까? 이런 걸 배우는 게 재밌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연을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낄낄 웃기까지 했다.



<기원 the Origin>(휴머니스트, 2016)은 그 특강을 주최한 카오스 재단에서 기획한 책이다. 2014년 말 과학지식을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카오스 재단. 6개월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10회의 강연을 기획하는데, 2015년 1월 선정한 첫 주제는 ’기원’이었다. 그리고 그 강연의 내용을 모아 펴낸 책이 바로 <기원 the Origin>이다. ’렉처 사이언스 KAOS’ 시리즈 첫 번째 책.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자 과학의 가장 큰 질문을 담고 있는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열 명의 석학이 풀어놓았다.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우주의 기원), 김희준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물질의 기원), 최덕근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명예교수(지구의 기원), 최재천 국립생태원 원장(생명의 기원),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암의 기원), 이홍규 을지대 석좌교수(현생인류와 한민족의 기원),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종교와 예술의 기원),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문명과 수학의 기원),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과학과 기술의 기원), 박성래 전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한국 과학기술의 기원).



강연진의 면면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과학자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이름이 더러 보인다는 점이다. 강연진뿐만 아니라 각 강연 이후 이뤄진 패널 대담에도 인문학자 패널들이 여럿 참석했다. 과학에 대한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통섭(通涉)’의 시각을 갖게 하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열 개의 세부주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제5강인 ’암의 기원’. 우주와 지구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암의 기원이라니, 다른 주제들에 비해 뭔가 튄다. 암의 기원이 강연의 한 주제로 들어간 것에 대해 강연자인 이현숙 교수는 "암은 사고나 전쟁 외에 인간 종의 수명을 결정짓는 질병이기 때문"(157쪽)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노벨 생리의학상, 노벨 화학상의 발견은 거의 암생물학의 역사"라며, "64퍼센트 정       도가 암과 관련된 연구에 수여"(173~174쪽)됐다고 덧붙였다.



제4강 ‘생명의 기원’ 강연을 맡은 최재천 국립생태원 원장



국내 최고 수준 석학들이 들려주는 ’기원’에 대한 열 가지 이야기



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라 할 만한 석학들이지만, 말 그대로 ’대중’강연인 만큼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시각적인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제2강 ’물질의 기원’의 강연자 김희준 교수는 자작시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우주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거대한 역사/ 그 거대한 드라마는/ 또한 역동적이네// 우주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우주 한 구석에 앉은 우리가/ 우주를 이만큼이나마/ 이해한다는 것/ 이것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말 - 63쪽 김희준의 교수의 자작시



책 역시 강연의 재미를 지면에 옮기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일단 보통의 책보다 넓은 판형과 ’올 컬러’의 내지. 책에는 실제 현장 강연에 사용된 이미지가 많이 실려 있는데, 넓은 판형과 ’올 컬러’의 색상은 이미지를 더 부각시켰다. 그리고 매거진처럼 시원시원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눈에 띈다. 본문 구성에서도 노력이 엿보인다. 대개 강연 이후에 이뤄지는 질의응답 내용들은 책에서도 강연 내용 뒤쪽에 몰아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본문의 해당 내용 가까이에 질의응답 박스를 입체적으로 배치해 자연스러운 맥락으로 질의응답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왔다.



사실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어 펴내는 경우는 흔하고 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책의 재미가 강연 현장의 재미보다는 못하다. 눈앞에서 ’4D’로 진행되는 실제 강연의 재미를 1차원의 지면에 텍스트만으로 전달한다는 게 어디 쉬울까. 하지만 이 책은 몇 가지 노력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나 같은 ’과알못(과학 알지도 못하는 사람)’도 졸지 않고 책의 내용을 따라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책을 통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들은 수도 없다. 그리고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 알게 된 것도 많다. 20년 전 중학생 때 과학(그때는 물상과 생물이었나?) 교과서에서 어렴풋이 읽은 듯한 용어들도 다시 만났다. 그때는 시험 성적 때문에 억지로 외웠던 것들인데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읽으니 새삼 반갑고 가깝다. 책 한 권 읽었더니 "아인슈타인보다 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아래의 인용을 봐라. 위에 옮겨놓은 김희준 교수의 자작시에 대한 설명이다.



여러분은 한 시간 뒤쯤에는 아인슈타인보다 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빅뱅우주론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죠. 이 거대한 우주에서, 그중에서 아주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우주의 시작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지구 바깥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인류는 우주에서 상당히 특별한 위치에 있을 겁니다. - 63~64쪽 



사실 빅뱅우주론이 뭔지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인슈타인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과학이라는 게 좀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괜히 어깨가 으쓱 올라가기도 한다. 읽는 사람에 따라 이 책에서 얻는 것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개별의 강연 주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얻는 것도 아주 크겠지만, 나한테는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를 느낀 것이 더 컸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동굴벽화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이 책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앎의 재미’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질문하는 재미’



책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강연을 따라가고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빅뱅우주론’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그렇다 1960~1970년대 정상우주론은 빅뱅우주론과 경쟁했다. 정상우주론을 주장한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 라디오 방송에서 빅뱅우주론을 비판했는데, 그때 "아니, 그 처음에 대폭발이 뻥(big-bang) 하고 터졌다니 말도 안 돼"라고 비꼬면서 한 말 때문에 빅뱅우주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경쟁 학설의 이름을 붙여준 호일의 기분, 어땠을까?



그밖에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과학계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사기극”이라 불리는 까닭은 뭔지(137~138쪽), 아인슈타인은 왜 자기 자신을 ‘종교인’이라 불렀는지(223쪽), 뉴턴이나 라부아지에 같은 과학자들은 왜 한 번도 ‘과학자(scientist)’라고 불린 적이 없는지(298~299쪽), 어째서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유행어’가 됐는지(328쪽), 측우기를 조선 과학의 증거로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지(338쪽) 등 통념을 뒤집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주제 가까이로 안내한다.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던 부분은 고대의 ’동굴벽화’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열 번의 강연 가운데 세 번의 다른 강연에서 동굴벽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한 번은 종교와 예술의 시작, 다음에는 수학의 시작, 그 다음에는 기술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동굴벽화 하나에서 종교와 예술, 수학과 기술의 시작을 동시에 읽어내다니. 이 책의 제목이 ’기원’이라는 점에서 재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주는 부분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다시 지난 4월에 가본 카오스 특강 현장이 떠올랐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낄낄 웃기까지" 하며 책을 읽고 나니, 강연 현장의 그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앎의 재미’를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앎의 재미보다 더 큰 재미는 바로 ’질문하는 재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진실인지, 책에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이런 지식을 구하는 과정은 어땠을지, 앞으로 이 지식은 어디까지 넓어질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확인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책의 머리말 첫 문단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을 읽어볼 사람이 있다면,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한 번에 내처 읽어버리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 한 강연씩 끊어 읽으면서 의심하고 질문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찬찬히 밟아가면 더 좋겠다. 



앞으로도 질문은 이어진다. 후속 강연인 ’빛 the Light’(2016년 7월 예정), ’뇌 Brain’(2016년 9월 예정)이 ’렉처 사이언스 KAOS’ 시리즈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으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누군가는 ’먹고사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거 다 알아서 뭐해?’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에게 <기원 the Origin> 제1강에 나오는 우종학 교수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여러분의 우주는 얼마나 큰가요? 집과 직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주 작은 우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비록 지구라는 아주 작은 행성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지성의 품 안에 우주를 품고 인식의 틀 안에 우주를 담아낸다면 비로소 우주의 일부, 우주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29쪽



사진 : 휴머니스트 제공


글 : 최규화(북DB 기자)


기사 더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부자의 24시간, '그'가 지켜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