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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칼럼

자꾸 성형수술을 하고 싶어요

원빈 스님의 청춘 고민 상담소

by 인터파크 북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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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제가 이번에 성형수술을 네 번째 했어요. 수술한 후에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 때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거울을 보면 ‘마지막으로 여기만 고치자’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성형수술에 중독된 걸까요? 제가 비정상적인 거겠죠?



비정상적인 것 맞습니다!



이미 불만족의 그물에 걸려드신 거예요. 성형수술을 하면 처음에 만족하다가도 곧 다른 부분에 불만족을 느끼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시 수술을 하고… 이렇게 반복하는 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정상적인 것 맞습니다.



일단 ‘그래! 나는 비정상적이다!’ 이렇게 인정하세요. 그렇게 지나간 과거를 쿨하게 인정하시고서 이제 선택해보세요. 계속 비정상적으로 사실 건가요? 아니면 정상적으로 돌아오실래요? 자, 이 선택이 첫걸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떤 선택을 하시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붓다의 제자 중에 바카리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이 비구가 병에 걸려서 한참을 고생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마지막으로 뵙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숟가락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죠. 그래서 신도에게 부탁을 합니다.



“재가신도여, 부처님을 이곳으로 모셔 와줄 수 있는가?”



신도에게 전후사정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기꺼이 제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죽어가는 바카리 비구는 부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일으키고자 애썼습니다.



“바카리여,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일어날 필요 없다.”



붓다께서 억지로 그를 다시 눕게 하자 바카리가 말했습니다.



“붓다여, 저는 곧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붓다의 발 앞에서 얼굴을 우러러 뵈며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바카리에게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만 둬라 바카리여,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 바카리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볼 것이다.”



바카리는 부처님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절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죠.



진정으로 존경을 표하는 방법은 썩어가는 육체가 아닌
부처님의 정신인 진리에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보통 육체와 정신을 ‘나’라고 여기는데요. 둘 중에 보다 근본적인 것은 분명히 정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육체를 중요시 여기죠. 하지만 육체는 시시각각 썩어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의 마지막 종착점이 바로 완전히 썩어 흩어지는 것이니까요.



한국말에서 정신에 해당되는 단어는 ‘얼’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로 ‘꼴’이라는 표현이 있죠. 이 두 단어를 합치면 ‘얼꼴’이 되는데 정신이 나타난 모습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얼꼴이 소리가 변화하여 얼굴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가설이 있죠.



사람의 얼굴은 성형수술이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마음씀씀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성형수술은 마음을 예쁘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을 하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겠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현실적인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주관적 만족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예뻐 보여야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대접을 받을 수 있겠죠. 안 그런가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객관적 아름다움을 갖추는데 성공하는 사례는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하면 다 예뻐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착각에 기대를 거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성형수술을 해서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던 여배우들이 오히려 객관적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오히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성공사례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 객관적 아름다움을 성취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묘해서 아름다워진 얼굴을 거울에 계속 비춰보다 보면 ‘여기 조금만 더…’이런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수술을 하죠. 또 성공을 할까요? 만약 성공을 해도 다시 반복입니다. 또 하고 싶죠. 이것이 불만족의 그물에 걸린 모습입니다.



불만족의 그물에서 벗어나세요.



성형수술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형수술이 가져올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성공사례만 보시면 안 됩니다. 또한 성공하더라도 다시 불만족의 그물에 걸려드는 이것도 문제입니다. 불만족과 집착이란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으니까요.



똑같은 얼굴 형태를 가진 사람도 아침과 저녁에 느낌이 다릅니다. 어제와 오늘이 느낌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느낌이 다르죠.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예쁘게 빛나는 사람은 똑같은 형태의 얼굴을 가지고도 상대방에게 훨씬 예쁘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내려놓고 만족하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하루에 열 번씩 의도적으로 활짝 웃는 연습을 해보세요. 연습을 오랫동안 즐겁게 하다 보면 아이들의 천진하고 예쁜 표정을 되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성형수술을 또 하시더라도 이 연습은 꼭 해보세요. 더욱 더 예뻐질 수 있을 거예요.


글 : 칼럼니스트 원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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