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메시지, 아이 그림을 명화처럼 감상하며 '아이 그림 읽어주는 여자' 권정은의 해설을 들어봅니다.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 내 자신, 그리고 세상과 다시 나누는 이야기. 이 연재는 권정은 'Art Centre 아이' 원장의 책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편집자 말
상은이에게 도화지 대신 종이상자를 주며 그 위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상자 가운데에 있는 칸막이가 그림에 반드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라는 한 가지 조건을 두었다. 무려 40분간이나 뭘 그릴지 고민에 빠진 상은이를 보다 못한 정원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아…… 그냥 똥이나 그리라고 하세요."
그때였다. "아, 똥!"
갑자기 상은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할머니와 절에 갔을 때 본 재래식 화장실을 떠올린 것이다. 종이상자의 가운데 칸막이는 자연스레 구멍 뚫린 재래식 변소의 똥 떨어지는 바닥이 되었고, 그 아래 칸은 똥들이 가득 차고 언뜻 보면 사탕처럼 보이는, 똥파리들까지 윙윙대는 변소 바닥이 되었다.
늘 사람의 앞모습을 그리는 게 익숙한 아이들이기에 똥 싸는 사람의 앞모습을 그리려는 상은이에게 나는 다급하게(?) 뒷모습으로 바꿔주길 부탁했다. 다행히 내 청을 들어준 아이는 고민했던 40분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빛의 속도로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얘, 이렇게 둥그런 엉덩이를 크게 들고 똥 싸는데 갑자기 누가 왈칵 문을 여는 거야. 크크크!"
나의 상황 자극에 아이는 즐겁게 깔깔거리더니 놀라서 커다랗게 휘둥그런 눈을 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을 그려 넣었다. 오래 묵은 변비가 한꺼번에 뚫린 것처럼 시원하고 유쾌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나에게 아이는 선뜻 자신의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이 그림을 입체 액자에 고이 담아두고 매일매일 남 똥 싸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는다.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감사해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라고 하면 과연 거기에 '시원하게 똥 싸기'가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일상의 사소함에 대한 감사를 놓쳐버린 채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들만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생각보다 단순한 곳에 깃들어 있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실 수 있는 순간, 수많은 자동차들이 오가는 위험한 거리에서 오늘도 별 탈 없이 집으로 무사 귀환했다는 사실, 외국에서는 간절했지만 먹을 수 없었던 떡라면을 여기서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는 것, 딱 알맞게 익은 총각김치를 한입 베어 무는 그 순간, 지나가다 스친 사이좋은 노부부의 모습, 새로 빨아 놓은 보송보송한 이불에 맨발이 닿는 순간의 행복감,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딱 맞춰 도착하는 버스 등등 사소한 행복을 주는 순간은 참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무탈하게 치러지는 배변활동의 시원함에 감사하고 행복해하기가 있음을 상은이의 작품을 보고 퍼뜩 깨닫게 된 것이다.
사소하고 작은 일에 새삼스런 존경심을 갖고 대하기 시작하면 감사하게 되고 행복은 별것 아니게 쉽게 찾아온다.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똥 싸기' 같은 일상의 사소함에서도 큰 만족감을 느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안다.
글 : 칼럼니스트 권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