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마우스로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그게 참 힘들었다. 마우스 왼쪽 버튼만 살짝 누르면 끝나는 일을 두고 나는 몇 시간 동안 식은땀을 흘렸다. 마침내 오른손 검지에 살짝 힘을 줬다. 마우스에서 작은 소리가 났고, 내 가슴에선 쿵 소리가 울렸다.
10년 일한 직장에 마침표를 찍는 사직서는 빛의 속도로 사장 이메일함에 도착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렇게 나는 고정 수입이 없는 백수가 됐다.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합니다'라는 건조한 사직서를 쓰지 않았다. A4 네 장에 이르는 아주 긴 사직서를 사장에게 보냈다.
10년 일한 직장을 향한 저주와 욕설을 담지 않았다. 지난 10년의 소회와 앞으로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썼다. 한 대목은 이렇다.
어쩌면 오랫동안 품은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기자로서 4대문 안에 머물고 '4대문 안 사람들'을 주로 만나면서,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을 많이 느꼈으니까요. 4대문 안에는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있지요. 대기업 화이트칼라 노동자, 전문직 사람들, 고위 공무원, 정치인과 권력자, 4년제 이상 대졸자 등.
어디 사람만 그런가요. 교통, 문화시설, 맛있는 음식점과 고급 술집, 고궁과 역사, 언론사와 좋은 정보, 미술관과 박물관 등 대한민국 그 어느 곳보다 사회적 인프라가 화려합니다.
이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존재와 시설도 있습니다. 생계 어려움을 겪는 비정규직 등 블루칼라 노동자, 백인이 아닌 이주노동자, 결혼이민 여성, 수십 년 동안 쌀값이 오르지 않아 농가부채에 우는 농민, 감옥, 비행청소년, 굴뚝 공장 등 공해 시설. (줄임) 저는 4대문 안에 없는,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 4대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서울 4대문에서 한참 떨어진 지리산 피아골에 새 둥지를 틀었다. 내 첫 계획은 '장의사 되기'였다. 장례지도사를 만났고, 일할 때 입으려 검은색 양복도 한 벌 장만했다. 장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분명했다. '오늘날 사람의 죽음은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는가.' 직접 내 손으로 시신을 깨끗이 닦고 염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 만져보고, 기록하고 싶었다. 장례지도사의 짧은 말은 가슴까지 뛰게 했다.
"우리는 시신을 엄청 많이 만져보니까, 이제는 시신을 딱 보고 조금만 만져보면 ‘이분이 어떤 인생을 살았겠구나’ 하고 짐작이 가요."
손끝에 닿는 시신 근육의 느낌, 발과 손에 박힌 굳은살과 모양, 죽은 이의 표정, 특별히 살찌거나 발달한 근육의 위치 등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장의사의 세계. 놀랍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 세계에 아직 진입 못했다. '죽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전히 살인사건을 취재 중이다. 언젠가는 꼭 장의사가 되어, 옷장 속의 검은 정장을 작업복으로 쓸 생각이다.
세상은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한데, 수많은 신문과 방송의 주요 내용은 언제나 서울, 그것도 4대문 안 사람과 이야기로 채워진다. 권력을 감시한다는 이유로 많은 기자가 서울에 몰려 있다. 이들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어제 본 사람을 내일도 보며, 정부나 기업 고위 관계자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말을 받아 적어 기사를 쓴다. 그러다보니 이 기사는 저 기사와 같고, 저 기사는 이 기사를 베껴 쓴 게 부지기수다. 기자가 저렇게 떼로 몰려 있는데 권력이 이토록 오만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저 많은 기자는 감시견인지, 나팔수인지 한번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매체와 기자는 많으나, 이야기는 빈곤하고 권력자는 오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일부 매체와 기자가 탐사보도를 내걸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다만, 여러 기자의 탐사보도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데이터 돌리기, 방대한 자료 분석하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이야기 없는 사실만 독자에게 전달된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기자들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걸까
기자는 왜 거리로 나가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걸까? 미국의 사회학자 수디르 벤카테시는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시절에 사회학계에 같은 맥락의 질문은 던진다.
시카고 거리에서 본 약동하는 삶에 비하면 (사회학) 세미나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어쩐지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고 추상적이고 생기 없어 보였다. 연구자들 대부분이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대상인,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내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줄임)
나의 문제제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회학 분야는 오랫동안 이 두 가지 입장, 곧 양적-통계학적 기법을 이용하는 입장과 흔히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삶을 연구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략) 사실 과학적인 사회학 분파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교실에 처박혀 수학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수디르는 교실 모니터 앞을 뛰쳐나가 시카고 빈민가 주택단지 '로버트 테일러 홈스'로 향한다. 마약, 성매매, 폭력, 총기 사건이 빈번히 벌어지는 그곳. 첫날 그는 갱단에게 붙잡혀 빈민가 아파트 계단에서 밤을 보낸다. 시카고 갱단 '블랙 킹스'의 두목 중 한 명인 흑인 제이티와 인연을 맺는다. 수디르는 빈민가의 삶과 갱단을 연구하고 싶다고 제이티에게 말한다. 그러자 제이티가 묻는다.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에 대해 전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넌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된 거지?"
수디르는 제대로 대답을 못한다. 하긴 그때까지 수디르는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깜둥이'의 차이점을 몰랐다. 두목 제이티가 그 미세한 차이를 알려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교외에 살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넥타이를 매고 일해. 우리 깜둥이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어."
얼마 후 수디르는 깨닫는다. "진정으로 시카고 도심에 사는 흑인 청년들의 복합한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은 '천재 사회학자', '괴짜 사회학자'의 출발선이 됐다.
이후 수디르는 10년 가까이 블랙 킹스 갱단과 어울리며 갱단이 시카고를 장악해 살아가는 방식, 빈민가 주민이 경찰보다 갱단을 신뢰하는 이유, 심지어 갱단 핵심 지도부 이사회(?)는 24명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게 10년을 갱단과 함께 보낸 결과물이 바로 <괴짜 사회학>이다.
사회학이라는 말이 들어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내용은 영화만큼 극적이고 소설만큼 흥미진진하다. 사회학자가 쓴 르포집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그래도 무겁게 느껴진다면, '한국적 처방'을 내려본다. <괴짜 사회학>은 페이스북 최고 경영자 마크 주커버그가 2015년에 직접 읽고 추천한 책이다!
수디르는 훗날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옮겨 뉴욕의 지하경제, 특히 성매매가 어떻게 거대 도시의 한 부분을 지탱하는지 흥미롭게 탐사한다. 그 결과물은 <플로팅 시티>다. 이 책도 <괴짜 사회학>처럼 사회학의 영역을 크게 확장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두 책을 읽으니 2년 전 퇴사할 때 꾼 꿈이 다시 생각난다. 잃어버린 장의사의 꿈! 교통사고 등으로 훼손된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최대한 깨끗한 모습으로 유가족에게 인도하고 싶고, 초라한 삶을 살다가 사망한 이의 얼굴을 예쁘게 다듬어주고 싶다. 여러 상조회사가 장악한 한국의 장례문화에서 죽음마저 어떻게 돈으로 거래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죽음과 시신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는 건 아니다.
욕심이 있다면 <괴짜 사회학> <플로팅 시티>처럼 사실과 이야기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데이터 돌리기'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재밌는 탐사보도 책을 쓰고 싶을 뿐이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