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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l 18. 2016

'바람의 애우' 잊을 수 없는 그 살랑거림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 순수하고 기발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메시지, 아이 그림을 명화처럼 감상하며 '아이 그림 읽어주는 여자' 권정은의 해설을 들어봅니다. 아이 그림을 통해 아이와 내 자신, 그리고 세상과 다시 나누는 이야기. 이 연재는 권정은 'Art Centre 아이' 원장의 책 <내 마음에 아이가 산다>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편집자 말


바람이 분다. 손에 든 양산이 센 바람을 막느라 한쪽으로 휘어져 있지만 정말 기분 좋은 바람이다. 예쁜 옷을 차려 입은 여자는 온전히 그 바람을 즐기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치마의 레이스들이 바람 같다.


아홉 살 인우가 바람 앞에 서 있는 예쁜 여자를 그린 것은 사실 예쁜 옷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의 패션 포인트는 치마의 레이스들인데, 그것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상황과 포즈로 바람 부는 날 양산 쓰고 있는 여인을 생각했나 보다. 그림 속 여인의 미소가 바람보다 시원하고 양산 위의 햇볕보다 따스하다.


그리고 그림 그린 이유야 어찌됐건 인우의 그림 속 여인에게 부는 바람은 내 가슴에도 시원히 불어온다.

'양산을 든 여인' 백인우 작품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다 보면 어느새 복잡했던 머리는 가벼워지고 어지러웠던 마음도 편안히 내려놓게 된다. 바람의 목욕이다.


오래전 갤러리에서 일을 막 시작한 새내기 큐레이터였던 나는 처음 하는 직장생활이 너무 긴장되고 힘들어 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차에서 내리려는데 차 문 밖으로 왼발 하나만 내려놓고 일어나질 못했다. 집 앞에 도착해 긴장이 풀어지니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곡선을 그리며 다가와 내 왼쪽 뺨을 위로하듯이 한 바퀴 돌며 어루만지고 스쳐갔다. 바람의 애무. 그 살랑거림. 그날 저녁의 바람 한 줄기는 힘든 하루와 지친 영혼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살고 싶은 이유는 그리고 하루하루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서도 버티고 있는 이유는 그저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죽지 않고 잘 살고 싶은 진짜 이유는 바람 한 조각을 소중히 맞이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것을. 바람 한 줄기, 노을 지는 하늘, 코끝으로 들어오는 풀 냄새 머금은 맑은 공기를 한 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라는 것을.


이런 아름다운 사람을 그린 화가의 그림이 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양산을 든 여인’이다. 나는 열네 살 무렵, 모네의 그림들과 처음 만났다.

'양산을 든 여인'(Femme A L'ombrelle, 1886) 클로드 모네 작품


이 그림에서 특히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람에 길게 나부끼는 머플러 한 줄기와 치맛단의 펄럭거림이었다. 그림 속에서 바람은 온화한 봄볕과 함께 자연이 주는 부드러운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책에서 오려 내어 책상 앞에다 붙여두고 매일 눈으로 바람과 햇볕의 목욕을 했다. 그 속에서 나의 사춘기는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 인우도 이제 열네 살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인우는 이제 또 어떤 바람의 그림을 그릴까?


사실 이 그림에 부는 바람이 옷의 표현을 위해서였더라도, 인우의 내면에 행복한 바람과의 소통이 없었다면 결코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옷을 예쁘게 표현한다는 구실로 그의 순수한 감성으로 만났던 바람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옷 사이로 흘러가게 얹어 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인우의 어린 마음에도 바람은 분다.


인우는 그 흘러간 바람의 흔적 속에서 또 한 뼘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아이처럼, 아이와 함께 온화한 바람의 입김으로 계속 성장하길 꿈꿔본다. 


글 : 칼럼니스트 권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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