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샬로테는 온종일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며칠씩이고.
머릿속 생각마다 그 한가운데엔 알프렛이 있다.
그건 하나의 강박으로 변한다.
얼마 후, 그녀는 한없이 그의 얼굴을 그린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수백 장이나 스케치한다.
그가 했던 모든 말들 또한 기억한다.
현재가 영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그들의 첫날 밤 이후로 그는 다시 사라졌다.
한 마디도 소식을 들을 수 없다.
새엄마한테 노래도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샬로테는 그의 침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가 말했었지, 그로부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건 내 힘에 부치는 일이야.
샬로테는 외출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다.
새엄마에겐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말해둔다.
저녁에 외출하는 것은 언제든 위험한 노릇.
검문을 당할 수 있는 거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하지만 그런 위험이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가끔은 미소가 서류를 대신해주는 수도 있잖아.
특히 아리안족의 외모를 지니고 있을 때는.
샬로테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녀의 밤색 머리칼은 연하고 두 눈도 초롱초롱하다.
이 나쁜 피만 없었더라면 활개를 치며 살 텐데.
깜깜한 밤의 한가운데를 그녀는 걸어간다.
이윽고 그가 사는 곳 아래층에 서 있는 그녀.
반그림자 속에 숨은 채, 가슴은 열병인 양 뜨겁다.
올라가고 싶진 않아, 그냥 그 사람을 보고 싶어.
그리곤 깨닫는다, 그 사람, 강요하는 것만은 못 참을 거야.
그녀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의 자유를 완벽하게 존중해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왜 소식을 일절 끊고 있는 걸까
혹시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속인 것은 아닐까
나랑 지낸 밤이 끔찍스럽고도 실망스러웠나
그래도 감히 나한테 말할 용기는 없었던 건 아닐까
그래, 틀림없이 그거야.
그것 외에는 해석할 길이 없어.
어쩌면 내 이름조차 잊어먹었는지도 몰라.
샬로테; 내 이름을 그토록 즐겨 불렀던 그이가.
그 순간, 창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그의 그림자가 보였을 뿐인데 그녀의 마음은 어지럽다.
그의 방은 촛불로 밝혀져 있다.
촛불의 흔들림을 따라 알프렛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꿈의 속성을 현실에 부여한다.
바로 그 때, 하나의 실루엣이 그 장면을 방해한다.
거실에 어떤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다.
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알프렛을 와락 껴안는다.
샬로테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나 알프렛이 자유의 몸이라는 걸 잘 안다.
한 번도 내 남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어.
우리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관계는 그저 한 순간이잖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언제나 이렇다, 서로 다가가기만 하면 비가 온다.
하늘은 그들의 만남을 위해 흐려진다.
샬로테는 움직일 수도, 비를 피할 수도 없다.
알프렛은 엄청 짜증이 난 것 같다.
그는 여자의 팔을 거세게 부여잡는다.
그리고 여자를 출구 쪽으로 데려간다.
이제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샬로테와 지척에 선다.
여자는 애원한다,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이죠
이렇게 비가 오는데 떠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알프렛은 고집스럽게 광란의 몸짓으로 여자를 밀어낸다.
여자는 체념하고 고개를 떨군다.
알프렛은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아마도 안도감을 느끼며.
잠시 후 그는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샬로테를 본다.
그는 샬로테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시늉을 한다.
그녀는 인적이 끊긴 길을 천천히 건너온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는 싸늘하게 묻는다.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통 소식이 없어서…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어, 재촉해선 안 될 일이잖아.
그는 잠시 망설이다 올라오라고 말한다.
샬로테의 심장은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그이의 왕국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이 초라한 방의 마룻바닥.
어쩌면 다시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될지도 모를 곳.
샬로테는 팔걸이도 없는 의자 가장자리에 잠시 앉는다.
거북함으로 몸이 경직된 채.
그녀는 둘 사이의 규칙을 어겨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다, 그게 또렷하게 느껴진다.
절대로, 절대로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모든 게 끝났다, 그녀의 실수 때문에.
그녀는 그의 즐거움을 망치려고 태어났던 거다.
근데 뭣 때문에 몸을 파묻고는 이렇게 묻는 거지?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죠?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샬로테.
절대로 하지 마, 알아들어?
절대로.
하지만 이번만은 대답해주지.
그 여잔 내 약혼녀야.
몇 가지 자기 물건을 가지러 왔어, 그뿐이야.
아픈 것처럼 보이더군요, 샬로테는 그렇게 대꾸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까지 걱정해야 하나
잠시 후 그는 덧붙인다, 다신 이러지 마.
뭘요
찾아오는 것, 이런 식으로.
자네가 날 숨 막히게 하면, 자넨 날 잃게 돼.
미안해요, 용서해줘요, 샬로테는 되풀이한다.
그러다 다시금 용기를 낸다, 하지만 그 여잘 사랑해요
누구 말이야
음, 그러니까, 그 여자 말예요…
아무 것도 묻지 말라니까.
살아가면서 이런 말다툼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래.
자네가 모든 걸 알고 싶으면, 우린 갈라서야 해.
그 여잔 잊어먹고 있던 책을 찾으러 왔어.
하지만 내가 그녀와 같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샬로테는 그가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지금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바로 이런 감정을 몇 번이나 느끼는가
한 번, 두 번, 혹은 전혀 한 번도.
샬로테는 한기에 몸을 떤다.
이빨이 맞부딪혀 소리를 낸다.
그는 이윽고 그녀의 몸을 녹여주기 위해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