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서촌과 남촌 사이에 가로놓인 앞산까지 두 사람은 잰걸음으로 걸었다. 동트기 전이라서 다행히 내왕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생애(상여)도 안 나가고 그랬단가?"
"생애는 문. 그 때는 애기덜 목숨이 포리 목숨허고 똑같었단 게. 돌팔이 의사한테 통허먼 사는 것이고, 글 안 허먼 가는 것이여어. 오죽했으먼 반타작허먼 잘했단 말이 나오겄냐?"
“반타작이 뭇이란가?"
"열 명 나갖고 다섯 명 살먼 다행이다, 그 말이여어."
곡하는 사람도 없이, 장례 절차도 없이 항아리는 모래땅에 묻혔다. 물론 봉분이나 비석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바람이 불어 모래가 흩날리면 항아리가 통째로 드러나고, 냄새를 맡고 달려든 개들에게 시신이 뜯어 먹히는 일 또한 다반사였단다.
"심지어 똥개 입에 머심애들 불알이 물려있기도 했단다. 그런 땅에다가 딸을 묻어야 허는 에미 심정이 오죽했겄냐?"
"다른 디다 묻제 그랬는가?"
"무라리가 왼통 모래땅인 디, 그나마 앞산 아니먼 어디 묻을 디나 있간디? 마당에다 묻을 것이냐, 논에다 묻을 것이냐, 사람들이 댕기는 길바닥에다 묻을 것이냐?"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밤. 김씨는 누군가가 목을 누르는 통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이것이 꿈이려니, 틀림웂이 꿈에 구신이 나왔는 갑이다 싶어 소리를 치는 디, 암만해도 주둥이 배까테로 소리가 안 나온다. 그때 큰집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윷을 놀고 있었그든. 속으로 이 구신한테 지먼 틀림웂이 내가 죽고 말 것이다. 어찌 됐거나 배까테로 나가야 헌다 싶어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꽥하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빠져나왔다. 허리를 질질 끌며 방문 앞까지 기어와서는, 손바닥으로 문을 밀쳤다. 그리고는 속옷 차림에 맨발로 뛰쳐나갔다. 이씨와 남정네들이 달려들었다.
"어이, 문 일이여??"
"아짐씨, 어째 그러시오?"
"아이고, 나 조까 살래 주씨요. 뭇이 내 모감지를 꽉 눌러서 도망 나오는 중이어라우."
"쩟쩟, 애기 잃고 진 들캔능 생이요. 다 구신 짓꺼리여라우."
그녀는 속옷 차림인 줄도 모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첫딸의 죽음은 젊은 어미의 가슴을 예리하게 후벼 파고, 그 혼까지 앗아갔다.


"그러먼 누나가 죽고 나서 을마나 있다가 나를 났단가?"
"한 일 년? 아니. 반년이나 되았으까. 을마 안 되야서 들어 스드라. 본래 첫딸이 죽으먼 나중 아그덜이 좋닥 허그든."
"문 그런 법이 있단가?"
"몰라. 좌우간 사주쟁이 하나가 그러드라. 누나가 죽은 것이 야그, 너한테는 앨라(도리어) 더 좋다고. 그런디 너를 배고 나서 꿈을 꿨넌디야 이..."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올법한 태몽이었다.
"산신령같이 히컨(하얀) 머리에 히컨 수염, 히컨 옷을 입은 노인네가 느닷웂이 나오드라. 그러데이 나한테 검정 까우(표지)로 싼 큰 책을 한 권 주드란 말이다. 좌우간 앞에서 뒤로 냉기게 되야 있는 책인 디, 그것을 받고 난 게 그 노인네 허는 말이 ‘이 책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느니라’ 그러드란 마다."
"그러고는 이라우?"

"고것 뿐이여. 이 말만 허고 가 버리드라."

"..........?"
"내 생각에는 니가 암만해도 큰 공부를 해 갖고, 문 책 같은 것을 낼란 것이 아닌가 싶다마는. 그런게 부지런히 공부만 허먼 틀림웂이 너는 성공헐 것이다."
"다른 아그덜은?"
"느그 동상네들? 가시네들은 뭇이 뭇인지 모르게 시끌사끌헌 꿈만 꾸었이야. 그런디 아들 싯에 대해서는 모다 태몽다운 꿈을 꾼 것 같고..."
둘째인 태국의 경우, 역시 한 노인이 누런 황소를 끌고 나타나 그녀의 손에 고삐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단다.
"이 소는 느그 집 밭을 몽땅 갈아(耕) 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김씨는 녀석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밭을 갈아준다는 것은 살림을 책임진다는 말이 아니겄냐 싶드라. 지 팔자가 고로코 타고났넌 디, 억지로 공부시킨다고 될 것이냐? 잔소리 허는 내 입만 아프고, 저도 성가실 일이지야. 내 속으로만 너는 천상(어차피) 농사를 짓든지, 문 장사를 허든지 해서 돈을 벌 팔잔 게 허고 있지야. 그런게 꿈대로 안 되야 가지 않냐? 너는 뿌덕뿌덕(일부러) 허락 안 해도 공부를 허고, 고것은 누가 안 시캐도 죽어라 놀기만 허고. 그러고 공부해 봤자 되도 않을 것이고. 즈그 선생도 일찌감치 포기허는 것이 피차 신상에 좋겄다고 그러드라."


소를 닮아서일까. 그는 우직했다. 세상 물정 또한 어두웠다. 밥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릇에 담아주는 양만 먹었다. 그것이 맘에 걸렸든지, 김씨의 하소연.
"어째 저 아그는 더 주란 말도, 많다는 말도 안해야. 생전 배고프단 말도 안 허는 디, 또 주먼 준대로 다 먹으니 그 속을 몰르겄단 마다."
둘이만 있을 때, 그가 물어왔다.
"성! 어쭈코 허먼 배가 고프단가?"
"너는 배고픈 줄도 모르냐?"
"몰르겄넌 디."
"요로코...배가 살살 아픈 것도 같고, 뭇이 먹고 싶기도 허고 그런 것이제에. 아이고! 내가 깝깝해서."
"그런단가? 그러고 성! 성은 어쭈코 라디오 속에 든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는가?"
"뭇이라고야? 그러먼 너는 지금 말허는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몰르겄냐?"
"모르겄넌 디."
"아이고! 참말로 너도."
태민이 4학년 되던 해. 본부석 맞은편, 출발선에 서 있는 태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장 반 바퀴를 돌아 골인하게 되어 있는 달리기 경주. 본부석에는 기성회장인 이씨가 교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자꾸 뛰어나가는 태국으로 말미암아, 애를 먹던 심판이 드디어 총을 쏘았다. 그러나 정작 뛰어야 할 때, 녀석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심판의 손에 떠밀린 녀석의 몸이 뒤뚱거리기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아이들로부터 멀어진 상태.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녀석은 운동장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일착으로 테이프를 끊은 녀석은 시상담당 선생님 앞으로 가 조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그에게 공책이 주어졌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녀석은 의기양양해 했다. 상상을 초월한 어이없는 광경에 모두들 박장대소했고, 결국 그날의 '상'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달리기 대회에서 획득한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두 살 아래의 동생이 전개한 기상천외한 사건은 또 있었다. 사방이 고요한 어느 날 오후. 태민은 방 한가운데에 밥상을 펴고 앉아 숙제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툭탁 툭탁'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벌떡 일어선 것은, 어미 닭의 다급한 울부짖음과 병아리들의 비명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트렸기 때문. 부엌문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벌컥 여는 순간, 어두침침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는 커다란 빨래 방망이가 들려있었다. 부엌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큰 출입문을 꼭 잠가 놓은 채, 녀석은 이제 갓 깬 병아리들을 때려잡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십수 마리의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야!"
경악과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튀어나갔다. 하지만 녀석은 이쪽을 힐끗 한 번 돌아보았을 뿐,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저게 사람인가 귀신인가?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감히 다가서지 못한 채, 소리쳐 김씨를 불렀다. 그녀가 얼마나 병아리들을 애지중지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버선발로 달려온 김씨는 어처구니없는 사태 앞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오메이! 이 놈오 새끼가 미쳤디야, 어쨌디야? 어째서 내 아까운 삥아리를 다 죽이냐? 응? 아이고! 육실헐 놈, 호레이나 물어갈 놈. 먹은 밥 다 내놓고, 디져라 디져."
녀석과 김씨의 관계는 마치 천적(天敵)처럼 보였다. 김씨가 싫어하는 일들만 골라서 했으니. 당연히 공부는 하지 않았고, 부모 말은 듣지 않았으며, 고집은 세고 행동은 느렸다. 심부름을 보내면 중간에 놀아버리고, 돈 계산을 제대로 못하니 맘 놓고 가게를 맡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손에 잡히는 대로 가게의 물건을 집어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김씨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과자가 됐건 딱지가 됐건 가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어른들이 쓰는 품목이라든가 돈까지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의 모습은 기존의 그 이미지를 완전히 깨트리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동작은 민첩했다. 마치 삶의 의미를 발견한 듯,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한 듯 거들먹거리기까지 했으니. 어찌 보면 몇 달씩 굶주린 병사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조달해 주고 의기양양해하는 장군 같기도 했다.
때문에 녀석은 늘 김씨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그의 주접근로는 안마당과 연결된 가게의 뒷문. 이곳을 통해 살금살금 들어오다가 누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슬금슬금 나가버린다. 대신 가게가 비어 있을 경우에는 고양이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진열장 선반을 타고 올라가는데, 이때만큼은 과자나 사탕봉지를 높은 곳에 올려놓는 김씨의 수고도 도로(徒勞)에 불과했다. 공중에 매달려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손으로 연신 과자봉지를 바지주머니에 챙겨 넣는 동작은 공중서커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불룩해진 주머니를 두드려 보고 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쏜살같이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의 수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잠이 들었다가도 유사시에 퍼뜩 잠을 깨는 김씨의 '촉기'와 온 동네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어놓은 정보망, 그리고 탁월한 추리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며칠 동안 과자가 팔리지 않는 '이상(異常) 현상'에 주목한 그녀는 동네 꼬마들을 상대로 사탕을 이용한 '정보 탐색전'을 벌였고, 그 결과 녀석의 '이적(利敵) 행위'가 들통 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때도 녀석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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