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하루는 태국이 흙을 파먹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와 부리나케 뛰어갔다. 녀석은 탱자나무 아래 모래를 파내어 야금야금 먹는 중이었고,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뺨을 후려갈겼다. 녀석의 입에서 모래알이 튀어나왔다. 양손에는 모래가 한 움큼씩 들려 있었고, 새카만 겉흙을 걷어낸 곳에는 하얀 모래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뜬 새끼들이 시캤냐? 씨벌 놈들..."
철없는 녀석을 사주한 아이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렇다고 여러 명을 상대로 격투를 벌일 만한 실력은 없었으니. 이래저래 속이 상하여 퍽퍽 울고 말았다. 하기야 바보 같은 동생을 둔 내 탓이지, 늘 무료하고 지루하여 심심풀이를 찾는 촌놈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평소 동생들을 구박하고, 욕하고, 때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태민이었다. 잠자며 몸에 발을 얹는다고, 밥상에서 김치 국물을 흘린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던 태민이었다. 물론 녀석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놀림을 당한 양 속이 상했다.
또 하루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밖으로 나갔더니, 한 떼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가게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무리의 한 중앙에 태국이 자리해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의 목에는 산 뱀 두 마리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녀석은 좌우로 흔들어 대는 뱀의 대가리를 양손에 하나씩 틀어쥐고,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경악과 분노! 뺨이라도 후려갈긴 다음, 뱀을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섭고 징그러워,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뒷걸음질 치다가, 마침내 뒤돌아서 집으로 뛰어갔다. 사태의 전말을 보고받은 김씨는 부리나케 쫓아갔다. 그리고 이날도 녀석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김씨의 매타작 장소, 돼지우리 옆의 창이 없는 간이 목욕탕에서 걸어 나오며 김씨가 혀를 찼다.
"아이고, 암만 때래도 잉해 갖고, 통 잘못했단 소리도 않고...오메이 차말로!"
본래 녀석은 울거나, 비는 법이 없었다. 매를 들려고만 해도 손이 발 되도록 빌어대는 막둥이와는 딴판이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버티다가 중간에 항복하는 태민과도 달랐다. 끝까지 버티는 녀석에게 팔이 아파 견디기 힘들던 김씨는 ‘제발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수시로 욕을 먹고 심심찮게 두들겨 맞아도, 마음의 상처를 받는 기색조차 없었다. 일찌감치 공부와는 담을 쌓았거니와, 말수도 적었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일도 없었다. 이리저리 발에 채는 길가의 돌멩이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아무리 보아도 '별종'이었기에 식구들 가운데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이씨.
"인자 두고 봐라. 우리 태국이가 젤 잘 살 것이다. 왜냐허먼 우직허고, 정직헌 게. 사람은 모름지기 정직해야 허그든."
김씨와는 달리, 이씨는 육 남매 가운데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태민은 모든 면에서 태국이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씨가 그를 두둔할 적에는, 속이 편치 않았다. 심지어 묘한 열등감마저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 마음씨가 착하지 않은 걸까? 아버지는 내가 정직하지 않다고 여기시는 걸까? 정말 녀석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을까? 맞아. 녀석에게는 분명 내가 갖지 못한 장점들이 있어. 천성이 비단결같이 착해서 절대로 화를 내거나 싸우는 법이 없지. 또 도대체 겁이라곤 없으며 베짱이 유달리 두둑한 점, 인정이 많아 남에게 가져다주기를 좋아하는 것도 장점일 수 있고. 그런데 나는? 나는 성질도 못 되어먹었고, 겁도 많다. 배짱도 없다. 남에게 뭘 가져다주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나보다 태국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태국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밖에서는 인기 만점이다!


"태국이는 그런닥 허고... 태문이는 어쨌는가?"
"태몽 말이냐? 막두이도 꿈은 갠찮했지야. 잘 생각은 안 나는 디, 그것도 공부 쪽보당 돈으로 성공헐 것 같어."
"어메 꿈은 잘 맞히는 것 같어 이."
"차말로 내 꿈은 영해야."
그 꿈대로 자신은 열심히 공부하고, 태국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의 경우, 꿈뿐만 아니라 온갖 귀신 섬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명절 때에는 방이나 부엌, 당산나무 앞이나 헛간에까지 상을 차려놓고 새벽부터 일어나 소원을 빌었다.
"조상님들한테도 치성을 디래야 자손들이 복을 받는 것이여어. 그런게 너도 큰집이서 지사 지낼 때, 절 꼬박꼬박 잘 허란 마다. 건성으로 허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혀. 모를 것 같어도, 우게서 다 내래다 보는 법이그든."
종손 집안은 제사도 많았다. 그때마다 제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음복(飮福)을 한 다음, 자정 무렵에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젯밥을 먹곤 했다.
"그러고 내년에 너도 중핵고 시험을 봐야 쓸 턴 디, 이참에 내가 광주 조까 댕개와야 쓸란 갑이다."
"뭇헐라고..라우?"
"방림동 가먼 뽕뽕다리 밑에 유방구라고 있넌 디, 그 점제이가 참말로 영허닥 안 허냐. 갔다 온 사람들이 뜨겁게 맞춘다고 헌 게, 댕개 올란다."
"아따! 어메는. 우리 선생이 그런 것은 다 미신이라고, 아무 쓰잘 데기 웂다고 허드만은..."
"어허이! 누가 들으까 무섭다 이. 그러먼 그 선생은 지 죽을 날, 안닥 허디야? 너도 절대 그런 말 입에 올리먼 못써."
"..........?"
다정다감하던 얼굴이 어느새 근엄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각자 타고난 팔자가 있는 뱁이다. 시상 일이 다 사람 뜻대로만 되먼 뭇이 성가시겄냐? 그래서 다 점재이가 있고, 당골래가 있는 것이제에. 느그 동상 봐라. 누가 공부 허지 마라고 고사를 지냈냐, 어쨌냐? 그러고 내가 너보고 한 번이라도 공부 허라고 성가시기를 허디야? 그래도 너는 허고, 고것은 안 허지 않냐. 그러고 태문이, 그 째깐헌 것이 꼽꼽헌 것 조까 봐라. 지 돈은 죽어도 안 쓰그든. 누가 시캐서 그러간디? 다 즈그덜 타고난 팔자여어."
"알았단 게."
"요새 핵교에서 과학인가 뭇인가를 배운다고 그래싼 디, 은젠가는 다 지 팔자대로 돼야. 아직 때가 안 되야서 그러제."
"아부지가 무시락 안 허든가?"
"점재이 만나 갖고 돈이나 쓰까 봐서 벌벌 헌 디, 느그 아부지도 아직 뭇을 모른 게 그래야. 높은 공부만 했으먼 뭇 헌디야?"
"몰르게 갔다가 뚜드러 맞으먼 어찔란가?"
"그런게 내가 웂어지먼 거그 간 줄 알고, 너는 모른뜨끼 따까마시(감춤)허란 마다. 하니나! 느그 압씨한테 말허지 말고. 너도 보다시피 이노모 점빵 땜에 오무락딸싹도 못허는 판이제마는, 시방 점빵이 문제냐? 점빵은 금자년한테 맽길란다마는. 그년이 항시 건성이라 그것이 꺽정이란 마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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