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가난

금자는 길룡리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이다. 삐쩍 마른 체구에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열다섯 살짜리 소녀.
"다른 아그덜은 뭇이 뭇인지도 모른 게, 너라도 에미 속을 알아주고 한 팬이 되아야 헐 것 아니냐? 금자년은 호적에도 올려주고 아무리 말로는 내 새끼같이 생각헌닥 해도, 느그덜하고 어디 같겄냐? 이 집의 장남은 넌 게, 니가 정신을 채래야 동상들도 뽄을 받을 것 아니냐?"
"아따! 알았단 게."
"그러고 너는 다른 사람보당, 문 일이든지 잘 참어야 헌다. 이?"
"어째서?"
"무조건 참어야 헌단 게."
".........."
태민은 스스로의 죄가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이불에 오줌을 쌌다며 태국을 쥐어박은 일, 벽에 붙여놓은 껌을 떼어먹었다며 여동생을 발로 차 울린 일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우려는 다른 데 있었다.
"내가 말 안 헐라다가, 니가 뿌덕뿌덕 물어본 게 헌다마는.."
태민이 태어난 시간은 자시(子時), 그러니까 한밤중이었다고 한다.
"너, 감태 어메라고 큰집 뒷쩌너머에 사는 할메 아냐? 누가 애기 난다는 소식만 디키먼,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 탐박질해 오그든. 돈을 주는 것도 아닌 디, 문 천성인가 몰라야. 너도 그 할메가 받었어."
".........."
"씨잘 데기 웂는 소리제마는, 니 낯바닥에 피가 쪼까 묻어 나왔닥 허그든."
"내가...라우?"
"그래. 그런 사람이 깐딱허다가 큰일을 낼지도 모른닥 헌 게, 너는 암만 비어 나드라도 참어라 이. 카마이 보먼 너도 보통 때는 순헌 것 같은 디, 꼬라지를 내먼 물불을 안 가리지 않냐?"
"내가 은제 그래라우?"
"움마! 너도 느그 앱씨 아들인 디, 그 꼰지머리가 어디 가겄냐? 내 말 명심허고, 암만 뿔따구 나드라도 꾹꾹 참으란 마다. 알겄지야?"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태민더러 순하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동생들과 금자에게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짜증을 부리곤 했다. 김씨와 자주 부부싸움을 벌이고 그때마다 손찌검을 하는 이씨의 성정을 닮아서일까? 선천적으로 그 피를 물려받았든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보고 배운 데서 생긴 못된 버릇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씨도둑은 못 한다’는 김씨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알았어."

"너, 애랬을 때 눈만 벌어지먼 큰집으로 탐박질해 가고 그랬넌 디, 생각나냐?"
".........."
"우리는 항시 보리밥인 디다 오살노모 그 땔나무도 웂은 게, 밥이 늦게 되고 설익고 그런 게. 큰집은 고실고실헌 쌀밥이 나오그든." 태민이 그곳에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작은 큰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도 있긴 했으나, 큰아버지와 할머니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던 것. 그러기에 ‘니가 밥을 먹어버리먼, 우리 어메 점심 굶는다’며 두 팔을 끌어 내동댕이치는 성혜와 태준의 핍박에도 태민은 굴하지 않았다.
"차말로 너도 너지야. 기언치(기어이) 아침밥을 얻어먹고 온 게."
가난한 집 살림은 땔감부족으로도 드러나기 마련. 어느 날 김씨는 마음씨 착한 큰방의 큰딸과 함께, 서촌과 남촌 사이에 드러누운 앞산에 가서 솔가지를 꺾어오기로 결심했단다. 서슬 퍼렇게 산림녹화를 부르짖던 때.
"쥐도 막다른 껄막(골목)으로 몰리먼, 굉이한테 달라든다고 안 허디야? 엎어져 죽으나 뒤집어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고, 얼어 죽으나 데어 죽으나 쌤쌤인 디. 내 팔자에 뭇을 개리고 어찌고 허겄냐? 느그 압씨는 밤나 양심 궂은일은 허지 마라고 허는 디, 누구는 양심이 웂어서 그런 디야? 새끼들 낯바닥을 쳐다 보먼 당장 얼어 죽고 굶어 죽게 생갰넌 디, 양심이 밥 맥애 준디야? 그 전에 말도 안 있디야.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사흘 굶고 담 넘지 않을 놈 웂다고. 퍼질러 낳아 놓은 새끼들을, 두 눈 번히 뜨고 쌩 목숨 뺏을 것이냐?"
기회를 보던 김씨는, 이씨가 읍내를 나간 때를 포착했단다.
"그때 니가 여섯 살인가 먹었을 땐 디, 눈치가 비상해 논 게 나한테서 안 떨어질라고 생떼를 쓴 게, 고것 땜에 또 고상을 했지야."
"헤헤헤...내가 그랬어라우?"
"큰방 사람들이 눈치를 해서 그랬는지, 같이 놀아줄 사람이 웂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가 나갈라고만 허먼 난리다. 내가 무시락 허까 봐서 난창에는 태국이를 시캐서 울게 만들드라. 니가 알먼 태국이한테 뽀르르 말해버리고, 앞뒤 분간 못허는 태국이는 백락같이 소리침시로 울고. 그런게 니 눈까지 둘레먹어야 헐 판인 디, 어디 그것이 쉽냐? 근디 하로는...그날따라 눈할라 허벌나게 오드라. 하늘이 안 뵈는디..."
하늘은 마치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고 모자란 곳을 채워주기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양의 선물을 내려 보내는 중. 하지만 땅에서는 쌀도, 밥을 끓일 땔감도 없었다. 김씨는 변소에 간다 둘러대고 잠시 앉아 있는 척 하다가 살금살금 마당을 빠져나가려 했단다.
"그런디 우리 방이 해필 밴소허고 껄막 중간에 있었지 않냐? 니가 봉창에 눈 대고 있다가 막 나갈락 허먼 태국이를 쑤석거리는 거여. 그러먼 빽 허고 울고. 오는 눈 다 맞음시로 나무를 허는 디,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것 아니냐? 느그 성제를 놔두고 온 것도 그러고, 또 감시허는 사람도 꺽정 되고..."
산림감시원의 눈에 띄지나 않을까 그것이 불안하고, 쥐뿔도 없으면서 ‘법’이나 ‘양심’을 들먹이는 그 잘난 남편이 더욱 걱정이었다. 그러나 무릎이 눈 속에 푹푹 빠지고, 눈 녹은 물이 발을 적셔 금방 동상에 걸릴 것 같아도, 또한 솔가지를 맨손으로 꺾다가 피가 묻어 나와도, 하던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 열에 들뜬 듯 달아오르는 뺨,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지경이었으니. 그러나 '이왕 나온 김에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동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큰길을 피하여 김씨가 선택한 귀로 코스는 동네를 한 바퀴 휘감아 도는 벌판. 쌓인 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울퉁불퉁한 밭길인데다, 또 사람이 다니지 않은 탓에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집에 근접한 고샅에 들어서서는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내달렸다. 비몽사몽간에 목적지에 당도했을지라도 반드시 인기척을 확인해야 한다.
"혹시 느그 압씨가 와 있을지도 모른 게, 부석작 대신에, 거그서 쪼까 떨어진 헛간에다가 짐을 부려 놓아야지야. 그래야 느그 압씨 눈에도 안 딜키고, 동네사람들 몰르게 하나씩 끄집어내 쓸 수가 있그든. 그러고 시푸댕댕헌 솔가지가 잘 몰라야(말라야) 탈 것 아니냐?"
".........."
"그런디 시상에, 문데이 콧구먹에서 마늘씨를 빼 먹든지 그지 똥구먹에서 콩노물을 빼먹든지 헐 일이제, 그 큰방 작은 딸년이 그 낌새를 알고 야금야금 빼다 써야 쓰겄냐?"
"순 날강도 같은 년이구만이라우 이."
"너는 그런 소리 말어라. 좌우간! 세상에 독종들이 있기는 있는 생이여야. 같은 뱃속에서 나왔음시로도, 즈그 언니허고는 어째 고로코 안 타갰는가 몰르겄어. 그래도 난창에 생각해 본 게, 그날은 운이 갠찮은 날이었는 생이여."
며칠 후, 김씨는 큰방 큰딸과 함께 앞산으로 내달렸다. 이제 어느 정도 담이 커져서 손놀림이 능란해졌다. 이불솜 같은 눈을 털어 내며 솔가지를 꺾고 있는데, 큰방 딸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태민이 어메, 토끼씨오(도망가시오). 토깨라우!"
산꼭대기에 산림감시원이 나타난 것이다. 잡히는 날이면 형무소를 갈 수도 있고, 벌금을 물 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온 동네에 소문이 나는 일. 그랬다가는 성미 고약한 남편의 손에 맞아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솔가지를 내팽개치고 뛰기 시작했다. 낫과 망태기가 거치적거려 그마저 내팽개쳤다. 눈 속을 헤치며, 길인지 밭인지 모를 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동네 고샅까지 달려온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타리를 붙잡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두고 온 낫과 망태기를 생각하면 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작은 딸년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태민이 어메. 어째 우리 헛간에다가 솔가지를 놔 두요? 우리까장 잽해가먼 어찔라요? 책임질라우?"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더란다.
"내 속으로 '글안해도 미운 짓만 골라서 허는 년이, 빼먹을 것 다 빼먹고 인자 와서 지 삭신 다치까 봐서 되게 지랄헌 갑이네'라는 생각이 들드라. 그래도 어찔 것이냐? '어저께 밤에 꿈자리가 사납데이, 꿈 땜 헐라고 그러는 생이다' 생각 허고는 참었지야."
"어메는 밤나 꿈 이야기만 헌가?"
태민이 역정을 낸 것은, 단지 꿈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파란 '가시네'에게 당하고도 말 한 마디 못 한 그녀의 신세가 서럽고, 애잔하고, 또 그래서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운명이나 팔자, 꿈 탓으로 돌리는 김씨의 '편리'한 사고가, 모진 세월을 견뎌 온 힘이었음에야.
"좌우간 내가 그랬지야. '아이 애기씨. 징역을 가도 우리가 가제, 죄 웂는 그 집이서 갈랍디요. 어디 앵겨 놓을 디도 웂고 해서 그런 것인 디, 어찔 것이요?' 그랬데이... 이참에는 그 집 큰아들이 나서드라."
"큰아들...이요?"
"응. 지금은 많이 양반 되얐지야. 그때는 우리가 웂이 산다고 그랬는가 어쨌는가, 모두락시럽게도 대허드라. 무시락 허디야? '아짐씨, 우리가 벌금 물먼 어찔라요?' 그러든고. 나, 차말로..."
산림법이 엄격한 시절이다 보니 솔가지 은닉행위를 보고도 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죄를 물었단다. 형무소까지는 아닐지라도 벌금을 물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당신 같은 사람이 변상해낼 수 있겠느냐는 뜻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무시락 했는가?"
"헐 말도 웂는 디다가, 남정네까지 합세해서 달라드는 디 어찔 것이냐? 그런 디다가 '저것들이 이 앙당 물고 느그 압씨한테라도 일러 버리먼, 날배락이 칠 턴 디' 싶어서, 헐 수 웂이 말을 들었지야."
결국 김씨는 밤을 이용하여 솔가지들을 먼 친척뻘의 헛간으로 옮겼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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