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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30. 2016

스즈키 이치로와 아랫집 엄니, 그리고 김영란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창문 너머로 풀 베는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시계는 보나마나다. 새벽 5시 즈음이 분명하다. 지난여름, 늘 새벽 5시면 눈을 떴다. 더 잠자는 건 불가능하다. 온 동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예초기 엔진 소리는 그 어느 알람 소리보다 강력했다.

힘들게 '예초기 알람 소리'를 극복하고 눈을 감으면 이번엔 경운기 엔진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저쪽 드넓은 콩밭에선 엄니들이 빈 깡통을 두드리며 허공을 향해 힘차게 소리를 치른다. 

"훠이~! 훠이~!"

새 쫓는 소리다. 이 소리는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이후 새와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우리 선조들이 수백 년간 외친 진정한 '우리의 소리'다. 이쯤 되면 잠자는 걸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꿋꿋하게 자리에 누워 있다면, 아랫집 아버님이 문을 두드린다. 

"풋고추여. 고추장 푹 찍어 묵어봐."

이 모든 과정은 오전 5시부터 5시 30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크게 잡아도 5분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새 쫓는다고 이 시간에 깡통 두드리고 소리 지르면 현행범으로 5분 내에 체포될 거다. 하지만 여기 지리산 피아골에선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생활 방식이자, 생존 비결이다. 

여기 어르신들의 규칙적인 생활과 노동은 근면이니, 성실이니 하는 말로 설명이 안 된다. 그걸 뛰어넘는다. 겨울에는 산에서 고뢰쇠 물을 채취해 지어 나르고, 매화가 필 무렵에는 밭을 다듬어 씨앗 뿌리고 감자를 심으며, 벚꽃이 필 즈음엔 고사리 등 산나물을 채취한다. 여름엔 예초기로 무장한 채 풀과의 전쟁을 벌이고, 가을엔 밤과 감 등을 수확한다.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때에 맞춰 일제히 수확한다. 평생을 이어온 '노동의 필리버스터'는 어르신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자신의 일로 일가를 이루고 거장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일상은 특별하지 않다. ‘어제 하던 일을 오늘 하고,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한다.’ 이들은 ‘루틴(같은 행동규칙)하게’ 살고 그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일상을 꾸린다. 

최근 언론에 소개된 '살아 있는 야구의 신' 스즈키 이치로도 그렇다. 그는 경기 시작 5시간 전에는 경기장에 들어간다.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타격 준비를 한다. 비가 올 때도 똑같다. (한겨레 7월 10일 자 보도 인용) 비시즌 호텔에 머물거나 부모님 집에 갈 때도 훈련을 빠트리지 않는다. 

분야와 활동 공간은 달라도 이웃집 어르신과 이치로의 삶의 방식은 다르지 않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꾸준히 같은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 자신의 밥벌이를 해결한다는 점은 똑같다. 그 결과 한쪽은 살아 있는 '야구의 신'이 됐고, 다른 한쪽은 '농사의 귀재'가 됐다. 이들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몸으로 증명한다. 

이치로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여기 산골의 어르신들은 밥벌이 걱정을 크게 하지 않는다. 연금과 농가 지원, 도시로 떠난 자녀의 도움 덕이 있겠지만 생활비 정도는 자기 노동으로 해결하는 편이다. 

기자들아, 산골 어르신들처럼 바다 건너 이치로처럼 살면 된다

이 산골에서도 메시와 호날두가 대결하는 스페인 프로축구를 볼 수 있고, 인터넷의 속도는 서울과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최근 수개월 동안 이 산골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여인의 이름은 '김영란'이다. '박근혜'보다 많이 들은 듯하다. 이게 다 일명 '김영란법' 때문이다. 

정확한 명칭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지만 '김영란법'은 확실히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마법 같은 이름이다. 김영란법이 규정하는 공직자, 언론인, 사립학교 관계자 등의 '3만 원 식사, 5만 원 선물, 10만 원 경조사비' 금지 기준을 두고 도시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듯했다. 

특히 '밥값 3만 원 금지'를 두고 목에 핏대 세우는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콩밭에서 깡통 두드리며 새 쫓는 이웃집 엄니의 목청보다 큰 듯하다. 늘 3만 원 이상 고가의 식사를 삼시 세 끼 타인에게 제공받아 살아왔는지, 그게 금지되면 금방 굶어죽을 듯이 필사적이다. 

먹은 만큼 각자 계산하는 '더치페이' 하나면 끝나는 문제를 두고, 왜들 그렇게 싸우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구례에서는 한 끼 3만 원 이상 하는 밥집 자체를 찾기 어렵다. 고령의 농민이 주류인 곳인데, 농민은 그런 식사를 못 먹거나 안 먹는다. 

누군가 '3만 원 식사'를 공짜로 대접할 것이란 기대는 부질 없는 일이고, 과대망상이다. 무려 5만 원이나 하는 고가의 토종닭 백숙도 둘이 먹으면 1인당 2만5000원이다. 1인당 한 마리씩 먹으면 3만 원을 초과하지만, 둘이서 토종닭 두 마리 시켜 먹는 사람 아직 못 봤다. '3만 원짜리 밥'도 안 파는 동네에 사는 나는 1만5000원짜리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주문해 읽었다. 

여기저기서 하도 김영란, 김영란 하길래, 그가 쓴 책을 주문한 거다. '한국 사회를 움직인 대법원 10대 논쟁'이라는 부제대로 양심적 병역거부, 표현의 자유, 호주제 폐지, 존엄사 문제 등 합의가 쉽지 않은 우리 사회의 큰 이슈를 외국의 사례와 찬반 논리 등과 함께 다룬 책이다. 

법을 다룬 많은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하거나 결론내지 않는다. 열 개의 장은 모두 '바랄 뿐이다', '필요가 있다', '기대한다', '논의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끝맺는다. 책을 읽은 내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세상,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김영란법을 두고 찬반 의견을 갖는 건 각자의 자유다. 민주사회이니 찬반 논쟁이 붙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기자들이 벌이는 ‘밥값 전쟁’은 명분 없는 괜한 전쟁으로 보인다. 전쟁에 앞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을 읽으면 취재와 글쓰기에 도움이 될 듯하다. 

최근 서울에 다녀오면서 아랫집 엄니에게 복숭아 네 개를 사다줬다. 늘 내게 반찬을 챙겨주는 고마운 분이어서 사례를 한 거다. 저녁 무렵에 엄니는 밭에서 딴 호박 한 개와 오이 두 개를 들고 올라오셨다. 내가 "뭘 이런 걸 다…"라고 말하자 엄니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김영란법, 원리는 간단하다. 뭔가를 주는 사람은 되돌려 받을 기대를, 받는 사람은 돌려줄 부담을 갖는 게 당연하다. 부정은 거기서 싹튼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산골의 어르신들처럼, 바다 건너 이치로처럼 살면 된다. 자기 몸 성실히 굴려,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얼마나 깔끔한 삶인가.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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