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그러나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고급 종이와 그 위의 가지런한 인쇄체 활자들이 무척 낯설었다. 한 번도 풀어보지 못한 문제들이 '촌놈'을 놀리고 있었다.

'날 잡아봐라. 이 맹추야!'

맞아. 난 숨바꼭질이나 '찾기 살이'1)에서 늘 꼴찌였지. 오후에는 난데없이 졸음이 왔다. 이 판국에 웬 잠이냐 싶어 화들짝 깨어나기를 수십 번. 비몽사몽간에 필답 고사 시간들이 지나갔다. 체력장 시험을 위해 철봉대 앞으로 나갔고, 차례가 되어 무심코 윗도리를 벗었다. 순간 한 아이가 태민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괴성을 질러댔고, 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왼편 가슴에 하얀 천 조각이 붙어 있었다. 어제 아침 출발하기 직전, 김씨가 급하게 달아준 부적. 아마 이번에도 방림동 뽕뽕다리 아래에 사는 점쟁이 유방구로부터 불길한 점괘를 받았고, 액운을 떨쳐낸다는 명분으로 거금을 주고 산 것이 틀림없다. 유방구가 아니라면 평산 동네의 당골래를 만났든지. 미신이라 생각하면서도 마냥 무시하기도 꺼림칙하고, 또 옷의 안쪽에 있어 남의 눈에 띨 염려도 없겠다 싶어 떼어내지 않았던 것인데, 시험에 혼을 빼앗기는 통에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내 불찰. 나의 실수. 하지만 애당초 그것을 달아준 김씨가 원망스러웠다. 에이씨! 창피하게. 벌겋게 달아오른 손으로 무지막지하게 잡아 뜯어 꼬깃꼬깃 구긴 다음,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지근지근 밟아버렸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 도시 아이들에게 앙갚음하듯, 촌놈을 조롱하는 시험지에게 복수하듯.

턱걸이만은 평소부터 자신 있어 하던 종목이었다. 그런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보아도 천근만근 늘어진 몸뚱이는 도통 올라가지 않았다. 연습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회수. 눈앞이 아득하고 억장이 무너져 철봉대에 매달린 채 잠자코 있었다.

"야이 놈아! 다 했으먼 빨랑 내래 오제. 뭇허냐?"

".........."

스르르 팔을 놓았다. 교수형(絞首刑)을 당하는 사형수의 심정이 이런 걸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마음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아! 나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허우적거리고 있구나. 세상과 버성겨진 내 육체는 지금 이 순간,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가라앉고 있다. 침잠하고 있다.


작년 가을. 운동회는 끝났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민은 철봉대 근처의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교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호랑이'는 학교 앞 가게에 선 채 하염없이 소주를 들이켰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주제에 미끄럼판이 되어버린 뻘 땅을 걸어 기어이 백신동네로 향하였다. 한성에서 동남쪽으로 오 리 남짓 떨어져 있는, 반 여자아이들이 대여섯 명 몰려 사는 동네. 펄로 범벅이 되어버린 태민의 몸뚱이를 씻는다며 여자아이 둘이서 시시닥거리며 등짝을 후려 부치더니, 문옥이 헐렁한 제 아버지 옷을 내준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데, 경숙이와 주희, 문옥이가 캉캉 춤과 트위스트 맘보춤을 선보였다. 그러나 태민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어슴푸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눈을 떠 보았으나, 아직도 캄캄한 밤중. 조금 이상하다 싶어 팔을 휘휘 내저어 보니 문옥이의 검정치마 속에 몸뚱이가 파묻혀 있지 않은가. 아랫목에는 호랑이 선생님이 큰 대(大)자로 누워 있고, 대여섯 명의 가시네들은 이리저리 엉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내가 어저께 교장허고 한바탕 해 버렀다. 죽어라 고상헌 선생들한테 내일 출근허라고 허지 않겄냐? 다른 사람들 암 말도 못허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드라. 그래서 내가 출석부를 들어 책상을 꽝 내려치면서 일어섰지야. 내 좃도! 나는 내일 못 나온다고 소리를 질렀더니, 교감이 뛰어와서는 그러먼 심 선생만 쉬라고 그러드라. 그래서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어디서 아부허고 자빠졌냐고 백락같이 소리쳤더니... 그래서 오늘 모두 쉬기로 헌 것이여. 니들도 학교 갈 필요 웂고.”

".........."

"이태민! 너는 크게 되아야 써. 임마! 니 아부지가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르신 아니냐? 우리 젊은 선생들한테도 참 잘 허시고. 아먼! 역시 배우신 분이라 뭇이 틀려도 틀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오직 수제자 하나를 대동하고 백신동네까지 쳐들어간 호랑이의 파격적 행동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젊은 교사들로부터 원성(怨聲)이 자자했다는 교장 선생님. 그 여파 탓인지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의 한쪽 다리가 고무로 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중학교 입시에 만큼은 열과 성을 다했다. 체력장 연습장에도 꼬박꼬박 둘러보며 '뻔히 아는 문제도 점수를 못 따면 안 되지야'라고 충고했던 분. 그런데 이 맹추는 아는 문제마저 맞추지 못했으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일주일쯤 후.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에이씨발! 수험번호가 4번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하필이면 죽을 '사'(死)자가 무어냐?

기실 공부 외에 어떤 일도 잘한 것이 없었다. 놀이나 운동, 싸움질은 물론이고, 낚시질이나 꿩 몰이, 토끼몰이에도 소질이 없었으며, 라디오를 고친다거나 농사일을 거드는 일에도 늘 서툴렀다. 축구를 하는데 무조건 골대 안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손으로 공을 잡아 밀어 넣었다가 군밤만 무수히 맞았다. 스스로 진단해 보건대, 성격이나 마음씨가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태민에게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험성적이야말로 존재의 근거이자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나 바로 오늘, 그 칼날은 무디어졌고, 그 뿌리는 통째로 뽑혀 나갔다. 무심결에 터져 나오는 이씨의 한숨 소리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김씨의 표정이 더욱 절망을 몰아왔다. 차라리 매를 때리든지, 야단이라도 쳐주면 좋으련만.

'나는 불효자이다. 나는 한갓 비계덩이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쓰레기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뿐,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추풍낙엽처럼 후기에서도 낙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충격도 덜하고, 속도 덜 상했다. 김씨의 체념 섞인 질책은 차라리 위로였다.

"아이고! 다 팔자 속이여야.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디야? 그런게 뭇 헐라 부적을 땡개 버렀냐?"

"..........

지근지근 밟아버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다 팔자여야. 꿈자리 할라 오살나게 사납데이, 유방구도 그러드라. 올해는 어럽겄다고. 진작 나는 알고 있었씨야."

"..그러먼 어째 말 안 했는가?”

"어쭈코 너한테 그 말을 허겄냐? 그래도 혹시나 허고 부적을 달아주었든 것이제에. 좌우간 인자 잊어 버러."

하지만 그것이 잊고 싶다 하여 잊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변명거리를 찾아보았다. 변변한 참고서 한 권 없이 달랑 교과서 하나만 들이팠고, 잉크자국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등사지 하며, 공부방도 따로 없이 밥상 위의 침침한 호롱불이라니. 더욱이 연초에는 개간지 땅에 펄을 집어넣는 작업에 따라나섰다가 소달구지에 발이 깔려 한 달 동안 고생한 일까지 있었으니. 담임선생을 모셔다가 자정까지 책상머리에 앉아있었다 한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무미건조한 공부방식이 화려한 참고서와 아이템플 학습지로 무장한 도시 아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점.

졸업식. 이미 재수하기로 되어 있는 터에, 그 장면은 차라리 비극이었다. 하지만 교육감상 수상과 졸업생을 대표하는 답사(答辭) 때문에라도 불참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수석 졸업했다는 작자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니. 엇박자 인생, 뒤틀린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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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아이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동네 전체를 무대로 하여 숨바꼭질하는 놀이. 한 편이 숨으면 다른 편이 술래가 되어 찾아내고, 들킨 편은 다시 술래가 되는 게임.

강성률)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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