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치사량 맥주 세 병


"...자냐?"

"...아니...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누웠건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 나란히 누운 이씨 역시 몸을 뒤척이다가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는 태민의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월산동의 언덕배기에 자리한 사촌누나의 집에는 멀리 시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어른거리고, 온갖 소음이 여과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 무라리에서 광주행 완행버스에 실은 몸이 네 시간동안 시달린 데다 오후에는 수험표를 받아 오느라 마음마저 부산했던 까닭에 세상모른 채 곯아떨어질 만도 했다. 그러나 깜박 졸았다가 깨고 난 뒤로 잠은 삼천리나 달아나 있었고, 이상스럽게 정신은 더욱 초롱초롱해지는 것이었다.

작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일류 중학교에 합격하는 경사가 났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태민을 한층 초조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선두를 달린다는 점에서 그 선배와 태민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도 기대를 걸 것이다.'

합격 여부에 인생의 승부를 건 사람은 이씨뿐만이 아니었다. 김씨도 그 가운데에 있었고, 6학년 담임선생님과 심영진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정작 본인인 태민 자신. 친구들과 무라리 사람들의 눈은 매섭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늘 겹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4학년 담임 진길중이 일으켜 세워 칭찬하고 아이들의 박수를 유도할 때부터 일이 꼬인 것 같다. 그해 학년 말에 난생 처음 우등상을 받았고, 5학년 '호랑이' 심영진을 만나면서부터 더욱 고독한 길로 빠져들었다. 특별히 남보다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고, 스스로 머리 좋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때문에 이씨가 기성 회장이 되어 학교 출입이 잦아지고 담임선생이 특별히 챙긴 덕분이라 아이들이 수군대어도 그러려니 했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든 억세게 운이 좋은 그 선배가 싫었다. 진퇴양난의 갈등과 가슴 뛰는 고통을 안겨준 그가 미웠다.

차라리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잠이 잘 올지도 모른다는 이씨의 제안으로 택시를 탔다. 임동의 문화극장. 푹신푹신한 의자와 선명한 화면이 무라리의 밭 가운데 설치된 가설극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화에 몰입해 있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

'아!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영화가 있다면...'

그러나 하얀색 자막이 드러났을 때, 세상은 요지부동인 채였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조금 전에 기어 나왔던 이부자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영화 속의 스토리가 머릿속을 꽉 채우는 순간,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가슴 떨리는 시험을 앞두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씨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이라니. 잠자리가 바뀔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체질과 다른 때보다 더 잘 자야 한다는 조급증이 가세하면서 불면의 밤은 끝없이 이어졌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눈을 떴다. 뒤척거리다가 엉겁결에 잠이 들었던가 보다. 자리에 누운 채 두뇌를 점검해 볼 겸, '태정태세 문단세..., 구일은 구, 구이는 십팔...'을 뇌까려 보았다. 이상무. 근처 중학교 운동장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새 운동화를 신고 팔짝팔짝 뛰어 보았다. 철봉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백 미터 스타트 연습도 해 보았다. '빤히 나와 있는 문제를 틀려서는 안 된다'는 교장의 설득력 있는 훈시에 해가 질 때까지 체력장 연습을 했었다.

입시장 근처.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사람, 사람들. 출전을 앞둔 병사처럼 단호한 얼굴, 결의를 다지듯 굳게 다문 입술, 맹수처럼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 그것들이 태민의 왜소해진 몸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대목'을 만난 엿장수들이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 댔다.

"아이! 너도 엿 하나 먹고 가그라."

".....먹기 싫은 디라우."

"그런 소리 허지 말고, 하나만 먹으란 마다. 그래 갖고 엿같이 찰싹 붙어 버러야제에."

"본인이 먹기 싫닥 허먼, 냅두시오. 그러다가 배탈이라도 나 버리먼 어찔라고 그러요? 그것이 다 미신이제, 문 씨알 디 있다요?"

사촌매형 주봉달의 참견에 이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큰 큰어머니의 유일무이한 사위. 금쪽같은 아들 둘을 날려 버리고 소박을 맞은 그녀에게 딸 하나가 남았는데, 그 딸이 결혼 전에 연애를 했단다. 양가(兩家)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자, '신식 연애결혼'의 선구자적 기질을 발휘하여 일찌감치 도시로 올라붙었던 것. 두 사람 사이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감지한 태민은 재빨리 엿을 추켜들었다.

"옳제! 하나라도 먹어야 쓰는 것이여어. 암만 미신이라도 안 먹는 것 보당 낫제 어째야? 사람이 기분 문젠 것이여."

오늘따라 유난히 살갑게 구는 이씨가 낯설게 느껴졌다. 태민에게 아버지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셋방살이 하던 때이니 아마 대여섯 살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당에 강한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이씨는 큰방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태민은 통을 파고 있었고, 김씨는 성미 급한 이씨의 눈치를 살피며 달래는 중. 그때 이씨의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너! 차말로 밥 안 먹을래? 엉?"

어린 장남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역정부터 내는 그가 미웠다. 하지만 끝내 거역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로 밥을 말아 꿀꺽꿀꺽 삼켰었다. 이때의 참담한 기억이 김씨를 개 패듯 두들겨 팰 때의 장면과 어미돼지가 제 우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쇠스랑을 들어 찍으려 달려가는 이씨의 뒷모습과 겹치어 그 앞에만 서면 몸이 떨려오곤 했었다.

물론 상큼한 기억이 없었던 건 아니다. 광주를 다녀오는 길에 ‘빨강머리 앤’이라는 동화책을 사 건네주기도 하고, 함께 손을 잡고 가설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보다 더 극적인 장면은 남촌 아이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때에 일어났다. 태민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변소 뒤로 끌려가 집단 구타를 당했다. 기성 회장 아들이라 하여 담임교사가 챙겨 주고, 그래서 공부도 '부당하게' 잘하고, 그 때문에 건방지게 군다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태민의 입장에서는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아침 밥상머리에서 끝내 그들의 이름을 ‘고발’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묻던 이씨는 한달음에 학교로 내달았고, 학교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줄지어 선 젊은 교사들은 죄다 뺨을 얻어맞았고, 교장이 싹싹 비는 가운데 대대적인 범인 색출작업이 시작되었다. 주동자와 범행에 가담한 아이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구경한 아이들까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맨 이씨가 교무실과 교장실, 교실을 헤집고 다니면서 호통 치는 장면을 태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불안하고 초조하면서도, 한편으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 固所願-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간절히 원하는 바)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의 혼란 속에서 경험한 짜릿한 감격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부성(父性)의 확인으로 태민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하지만 엿은 달다 못해 씁쓰레했다. '이앙이먼 양씬 먹어 뻔지라!'는 이씨의 탐욕 앞에서 이가 흔들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뱃속이 달아서 더 이상 들어가질 않았다. 정문의 양쪽 기둥에도 엿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고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의 모아진 시선이 얼굴에 와 박혔다. 물론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뻥 뚫린 가슴속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림 한 장 없이 썰렁한 벽면들과 삐걱거리는 마루, 닳을 대로 닳아진 책상, 그 위에 붙어있는 수험번호 4번.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잘도 떠들어 댔다. 자신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모두 한 패거리. 나만 빼고 모두가 한 패로구나. 벌써 합격증을 받아든 양 기고만장한 그들을 바라보노라니, 샅바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기분. 시선을 둘 데 없어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과 앙상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들.

'빨리 시험이나 시작되었으면...'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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