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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Sep 28. 2016

개신교가 자본주의 '악'을 책임져야 하는 까닭

종교개혁 500년 우리는 지금

                      



클린턴 후보는 "역시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는 입장에 서서 득표운동 함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이겼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선거에는 역시 경제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어야 표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세상에서는 정치, 과학기술, 학문, 교육, 연예, 스포츠, 심지어 종교까지 경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역사상 경제가 이렇게 중요해진 때는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돈의 가치는 공유불가능(共有不可能, zero-sum)한 하급가치다. 돈은 경쟁을 유발하고 경쟁의 패자는 항상 약자다. 약자이기 때문에 경쟁에 지고, 경쟁에 지기 때문에 약자가 된다. 그런데 경쟁에는 항상 부정의 유혹이 따른다. 정직하기로 유명했던 독일에도 폭스바겐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리만 브라더스 사건이 벌어졌다.


경쟁이 공정하지 못하면 약자의 고통은 그만큼 더 커진다. 경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에 가장 요구되는 것이 경제윤리며 경제 정의다. 요즘 제기되는 정의 논의는 보응의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전적으로 분배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사실도 이런 요구를 반영한다.  


최초로 정의를 이론적으로 다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正義)를 "같은 경우는 같이 취급하고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정의(定義)했다. 그런데 그는 귀족과 노예는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와는 달리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평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재하는 인간사회에서는 항상 빈부, 남녀, 귀천, 유·무식 등의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정의를 위한 기독교적 노력은 이 차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고아, 과부, 객(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자, 소외된 자 등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동안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확대해 놓았고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이를 극대화하고 있다. 영국의 유서 깊은 구호단체 옥스팜(Oxfam) 대표는 지금 전 세계의 부의 절반을 62명이 누리고 있고 세계 인구의 1%가 전체 부의 99%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빈부격차가 늘어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동을 통해서 버는 돈보다 돈을 통해서 버는 돈의 액수가 더 커졌다는 사실이다. 무능하고 게을러도 돈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가 종교개혁, 특히 칼뱅주의에서 태동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견이 없지 않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그 주장을 다시 한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루터의 소명론(召命論)과 칼뱅의 예정론에 근거해서 신자들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소명이고 그 직업에 성공하는 것이 곧 자신이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노동해서 많이 생산했으나 철저히 절제함으로 성공해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칼뱅은 이자 받는 것을 허용했으므로 상업이 번창했고 돈이 돈을 버는 오늘의 상황에 단초를 마련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직업에서의 성공이 곧 예정의 증거로 보았다는 베버의 주장에는 이의가 많다. 그러나 소명론, 근검절약, 이자허용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고,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 할 수는 없어도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자본주의의 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종교개혁 가르침에 충실했다면 자본주의 위험해지지 않았을 것


그러나 칼뱅이 이자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에서는 돈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sterile)고 보았고 중세교회는 꾸어 준 돈에 대해서 이자 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런데 칼뱅은 상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그 시대에 돈을 빌려 사업을 하여 빌린 돈보다 더 큰 돈을 만드는 경우가 엄연히 있는데도 돈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약의 명령은 신약시대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무조건 이자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전적부패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칼뱅은 이자 허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자를 허용하되 일곱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었을 때, 사업에서 이익을 남기지 못했을 때, 공익에 어긋날 경우에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며, 국가에서 정해놓은 이율을 초과할 수도 없고, 대금이 직업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들 조건을 다 만족시키면 돈이 돈을 버는 오늘의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사실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외 조항을 둔 중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세계는 경제에 관한 개혁자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공익에 대한 관심, 돈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고 대금 그 자체가 직업이 되지 못하게 한 것, 부지런히 일하고 사치를 금한 것 등 정의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다 무시하고 다만 이자를 허용한 것만 잘 수행한다.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오늘의 자본주의가 이렇게 위험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개신교는 바로 현대 사회가 무시해버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익과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며 무엇보다 더 절제해야 한다. 베버는 종교개혁자들이 "세계내적 금욕"(innerweltliche Askese)를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절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며(딤전 6:10), 돈에 대한 탐심은 우상숭배(골 3:5)라고 경고한다. 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는 현대사회에서 윤리적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 모든 윤리는 정의로 환원되며, 약자를 착취하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 정의의 핵심이다. 이런 정의가 무시되면 자본주의는 약자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한 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독일 신학자 그룬드만(W. Grundmann)은 헬레니즘의 절제는 행위자 자신이 고상한 품격을 갖추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성경의 절제는 이웃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했다. 모든 이웃에게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고통당하고 있는 약한 이웃에게 고통을 더 하는 악은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정하게 행동하고 사회 구조도 정의롭게 고쳐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손봉호
'월드뷰' 대표주간,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이사장.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외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동덕여대 총장과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명예교수, 고신대 석좌교수이며 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 기아대책 이사장 등으로 섬기고 있다.


※ 본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세계관월간지 '월드뷰' 2016년 5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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