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울며 떼 쓰는 아이를 달래는 명약은 약국에서 팔지 않는다. 신비의 명약은 부모 손이나 주머니에 있다. 스마트폰을 건네는 순간, 아이는 마음의 안식을, 부모는 평화로운 일상을 맞는다. 주고 받는 스마트폰으로 싹트는 안식과 평화, 얼마나 달콤한 시간인가.
스마트폰을 두고 벌이는 아이와 부모의 사랑과 전쟁은 지리산 산골에서도 일상이다. 산과 들에서 뛰어놀며 호연지기를 키우는 아이들? 그런 건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시대 화랑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 산골에서 뛰어 노는 아이는 고사하고 걸어 다니는 아이 구경하기도 어렵다. 지리산 피아골에 사는 아이들은 지리산 반달곰보다 희귀하다. 2016년 1월 기준, 지리산 야생에서 사는 반달곰은 39마리로 파악됐다. 동네에 있는 분교의 전교생은 서른 명에서 한참 모자란다.
깊은 산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어 등교하는 아이? 글쎄, 이 높고 넓은 지리산 어느 동네에 그런 아이가 있긴 할 거다. 하지만 우리 동네 여러 아이들은 부모 승용차를 타고 등교한다. 수업이 끝나면 여러 부모가 다시 아이를 차로 모셔(?)간다.
집과 학교가 가깝지 않은 탓이 크다. 게다가 꽉 막힌 도시의 도로보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자동차는 더 빨리 달린다. 등하굣길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동네 골목길과 흙마당에서 시끄럽게 뛰어 놀고, 집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해질녘이면 마을에 울려 퍼지는 아이를 부르는 부모의 목소리?
이런 거 상상하면 곤란하다. 이젠 산골에도 굴뚝 있는 집은 드물다. 흙마당보다 ‘공구리 마당’이 대세다. 흙마당 고집하면 여름 내내 끝이 안 보이는 ‘잡초 제거 필리버스터’에 온몸을 바쳐야 한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이 없으니, 동네가 시끄러울 리 없다.
이 산골에서도 아이들은 대체로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스마트폰, 컴퓨터, TV가 가까운 친구다. 그 중 스마트폰이 갑 중에서 갑이다. 몇 시간이고 그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낸다. 그리 대단한 거 아니다. 온 세상의 어른들도 그렇게 사는데, 산골 아이가 무슨 수로 그 작은 요물에 정신을 팔지 않겠는가. 도시든, 산골이든 오늘날 여러 아이들은 뛰어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이런 생각을 자주했다.
'나 어릴 적엔 만날 밖에서 뛰어 놀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왜 집에서 노는가.'
'애들은 애들끼리 놀아야지, 왜 부모들이 애랑 놀아주는가.'
'나는 편도 1시간을 걸어서 등교했는데, 왜 요즘 애들은 걸어서 학교에 못 가는가.'
가장 편한 생각, 단순한 비교는 바로 "나 때는 말이야" 하는 사고방식이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추억만으로 이야기하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이 세상에 이토록 ‘꼰대’가 많은 건 누구나 편한 생각, 쉬운 비교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꼰대다.
나는 1982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세상에나, 무려 34년 전 일이다! 30여 년 전 경험과 기억으로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1980년대 초반이면, 스마트폰은커녕 바야흐로 유선 전화기와 컬러TV가 보편화되기 시작할 때였다. 불타는 금요일에 가볍게 치맥? 이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켄터키프라이드 치킨이 한국에 상륙하기도 전이었고, 치킨이 아닌 통닭은 무슨 기념일에나 먹을 수 있었다. 시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론가 끌려가는 시대였다.
이런 시절에 유년을 보낸 내가, 스마트폰 오락에 정신이 팔린 아이에게 "얘야, 애들은 나가서 뛰어 놀아야지. 나 때는 말이야…."라는 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우스운가. 아이가 "아저씨, 왜 자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쌍팔년도 시절 이야기 합니까?"라고 따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입장 바꿔 상상해봤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한 1982년, 아버지가 나를 앉혀 놓고 30년 전 이야기를 하면 어땠을까. 1982년 기준으로 30년 전이면, 한국전쟁 시절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던 때와 산업화 시절의 아이를 비교하는 건, 좋게 표현해서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
우습게도 나는 말이 안 되는 비교,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오늘날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유년의 내가 흙마당에서 자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놀이를 한 건 단지 그 시절에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포리스트 카터가 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인디언 체로키족의 아이 '작은 나무'의 성장을 다룬 책이다. 인디언 삶의 방식이 그랬듯이, '작은 나무' 역시 자연 속에서 많은 생명과 교감하며 살아간다. 과하게 취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만큼만 자기 것으로 가져가며 일상을 꾸린다.
그렇다고 인디인의 삶, 자연 속의 일상을 찬양 일색으로 그리지 않았다. '작은 나무'는 부모님의 사망으로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다. 국가는 근대 교육과 복지 혜택을 내세워 '작은 나무'를 조부모에게 빼앗아 보육원으로 보내기도 한다. ‘작은 나무’는 보육원의 폭력과 규율 속에서 살아간다.
책에서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은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가 있는 보육원을 찾아갔을 때다.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산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보육원에 남을지, 산으로 돌아갈지 그 중요한 선택을 '작은 나무'에게 맡긴다. 이유는 하나다.
"네가 살아갈 삶이니까."
'작은 나무'는 먼길을 돌고 돌아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망한 뒤 '작은 나무'는 산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향한다. 산과 도시, 인디언과 백인의 삶, 어느 것이 좋다고 굳이 강요하지 않는 책이다. 그저 '작은 나무'의 기쁨, 슬픔, 분노, 사랑을 천천히 따라간다.
삶에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도 대개 무의미하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기쁨과 슬픔이 있을 거다. 인디언에겐 그들의 방식이, 바다 건너온 백인에겐 또 그들만의 세계가 있듯이 말이다. 자기 스타일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 폭력과 불행은 여기서 싹튼다.
30년 전의 경험과 기억으로 오늘날의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근데, 그게 참 어렵다. 꼰대가 되는 건 그토록 쉬운데, 꼰대에서 탈출하는 게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밖에서 뛰어놀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불행할 거라 여기는 일이야말로 꼰대의 생각이지 싶다. 아이들은 각자의 생활 방식에서 재미, 행복, 삶의 의미를 차곡차곡 쌓을 거다. 1982년의 내가, 1952년 한국전쟁 시절의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말이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