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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Sep 29. 2016

[숨겨진 명작]아버지와 딸, 3218일간의 독서 약속

김홍기의 세상의 모든 책들

           

※ 지금 세계의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국내 최대 출판 에이전시 임프리마 코리아의 김홍기 디렉터가 유럽·미주·아시아 지역 출판계 동향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읽어준다. – 편집자 말

우리는 책을 왜 읽을까?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중요한 사람들은, 꼭 책을 읽으라고 반복해온 것일까?

여기 앨리스라는 소녀가 있다. 앨리스의 아빠는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였는데, 엄마 없이 자란 자기 딸을 위해서 항상 헌신적인 아빠였다. 앨리스 오즈마(Alice Ozma)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는 아빠와 한 가지 내기를 한다. 아빠는 앨리스가 잠들기 전에 항상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이 '책 읽어주기'를 100일 연속, 하루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지 부녀가 서로 작은 '약속'을 한 것이다.

당연히 이 부녀의 소박한 내기는 멋지게 성공하고, 아빠와 딸은 자축의 의미로 팬케이크 파티를 했다. 그렇게 101일째 되던 날, 내기도 끝났고 더 이상 아빠가 딸에게 책을 읽어줄 이유가 없어진 첫 날, 부녀는 서로 표현은 안 했지만 묘한 서운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그렇다. '잠자기 전에 책 읽어주기' 행위는 앨리스와 아빠에게 하나의 '제의(祭儀, 의식)'가 되어버린 일상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 아빠는 책을 읽어주고 딸은 경청하고 서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상이 날마다 계속되었고, 이는 앨리스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3200일 이상 계속되었다.

<리딩 프라미스> 미국판(Grand Central Publishing) 표지


미국의 명문 로완대학과 펜실베니아대학의 교양과정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 앨리스 오즈마의 에세이 <리딩 프라미스>(THE READING PROMISE)는 이렇게 앨리스가 아빠와 3000일간 함께한 시간에 대한 추억과 가족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자, 책에 대한 소회를 담담하고 따뜻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이렇게 아빠가 매일 읽어준 책들에 대한 개인적인 앨리스의 수기는 그녀의 대학생 시절부터 뉴욕타임즈에서 주목하는 등 관심이 이어져왔다. 

<리딩 프라미스>에서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아기곰 푸우', '셜록 홈즈' 등 100편이 넘는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또한 세계적인 동화 작가인 주디 블룸의 다양한 작품들, '오즈의 마법사'와 '해리 포터 시리즈', 셰익스피어의 여러 희곡들과 각종 백과사전들에 담겨 있는 의미 있는 에피소드들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딩 프라미스> 영국판, 이탈리아판, 한국판 표지


앨리스는 <리딩 프라미스>에서 ‘이렇게 아빠가 매일 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들을 아빠가 읽어줄 때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그 생생한 느낌 자체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책에 대해서 아빠와 논쟁하면서 싸우기도 하고, 우기기도 하고, 약속하고 다짐하기도 하고, 감동하고 깨닫기도 하면서 자신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앨리스에게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얻는 도구를 뛰어넘어, 유일한 가족인 아빠와 더욱 따뜻하고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으며, 빈번하고 깊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정체성을 올바르게 형성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리딩 프라미스>는 책을 읽는 행동 또한 확실히 습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면서, 이 단순하지만 9년간 이어온 습관이 한 인간을 어떻게 형성해가는지 독자들이 충분히 음미하게 한다.

<리딩 프라미스>는 한 소녀가 책을 통해 아빠와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매우 따뜻하고, 인상 깊게 들려주는 에세이이자 책에 관한 훌륭한 정보서이다. 또한 여기에는 청소년과 성인이 읽고 경험해봐야 할, 우리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작품들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앨리스 아버지의 직업이 도서관 사서임을 주목하라.) 엄마의 입장에서, 아빠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충고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러한 충고를 받고 성인이 된 저자가 아빠와의 경험을 추억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글 : 칼럼니스트 김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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