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죄와 벌


후기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야겠다. 나에게 늘 절망을 안겨주는 곳, 나 이태민을 패배자로 기억하는 곳, 일류고의 배지를 단 친구들과 마주치기 십상인 광주를 떠나야겠다. 이렇게 맘먹고 시흥동 언덕배기의 작은 이모집에 들렀다. 하지만 '눈뜬 사람 코 베어 간다'는 사람들이 무서워, 새벽부터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겁이 나, 아니 '이태민'이라는 존재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그 눈초리들이 싫어 포기하였다.

수험표 배부 전날 초저녁, 목포행 호남선 야간열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송정리를 그냥 지나쳐 영산포까지 떠밀려 갔다. 그리고 아침 완행버스로 광주로 올라왔다. 물론 고숙이 미리 접수해놓은 덕분에 수험표는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강대강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통지서를 받아 냈다. 얼마 후, '우수반에 편성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수반이라? 쓴웃음이 났다. 광주 후기 고등학교 가운데에서는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린다는 곳, 그 학교에서 우수반이라면?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닭의 머리가 되라!'는 뜻인가? 아니, 닭 머리도 아니고, 닭의 목 부근쯤 되겠는데. 이것으로 지난 3년의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것으로 만족하란 말인가?

숨을 헐떡거리며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건만, 전기고 낙방에 따른 좌절과 열등감으로 말미암아 학교생활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여기에는 방학 동안 무라리에서 벌어진 패싸움이 한 몫 거들었다.


정월 보름밤의 칠산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백부의 제일(祭日). 하지만 제주(祭主)인 사촌형 태준은 그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보였다. 태민 역시 부침개와 떡으로 대충 저녁을 때운 다음, 그와 함께 막 '꿩바탕'으로 나온 참이었다. 떡시루의 밑동을 닮은, 둥그런 달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람처럼 광호와 석형, 용철이 나타났다. 백신을 가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음을 다섯 모두 잊지 않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심영진 선생님을 따라가 하룻밤을 멋들어지게 보내고 온 추억의 동네. 과연 그때의 여자 동창생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스파이크 끈을 질끈 동여매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앞 한성부락에서 동남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벌판 한가운데 납작 엎드려 있는 마을, 옛 모습 그대로 달빛 속의 동네는 평화롭기만 했다. 입구에 자리한 경숙이네 집부터 들르기로 했다. 벌써 4, 5년쯤 흘렀나. 그때에 하룻밤(?) 자고 갔던 곳이라, 그리 낯설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인기척에 놀란 개들이 컹컹 짖어 댔다. 그러나 여전히 방안 쪽에서 들려오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다섯 명의 '장정'들이 문 앞까지 다가가 경숙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웃음이 그쳤다. 낯익은 얼굴들. 주희와 문옥. 그러잖아도 좁은 방이 사춘기 머슴애들의 우람한 몸집들로 인해 더욱 협소해지고 말았다. 경숙이 누비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이죽거린다.

"오메이! 석형이가 요로코 컸디야 요?"

"니가 많이 컸다. 가시네야!"

예상치 못했을 반격임에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태민 쪽을 돌아본다.

"너도 진짜 많이 컸다 이."

"가시네들이 으런들을 데리고 논다냐, 어쩐다냐?"

"아이고. 웃기지도 않는다 야. 국민학교 때 째깐해 갖고 그러데이, 흐흐흐 웃겨서..."

"웃긴다고...야?"

자신에 대한 경숙의 호감을 감지하면서도 이상스럽게 입에서 나가는 말은 거칠었다. 초등학교 시절, 늘 여자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던 처지인지라 이제 그 편견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맞아. 어떻든 몸가짐이나 말씨를 '중량감 있게' 가져가야 한다! 똑같은 생각이었을까. 야윈 체격의 석형 역시, 그리 넓지 않은 어깨를 으쓱 펴 보인다. 그때 아랫목에 앉아 한껏 무게를 잡던 용철이 불쑥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으니.

"어이! 후배들. 손님이 왔으먼, 뭇인가 대접을 해야제?"

두어 살이 더 많은 그. 가무잡잡한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는 완연한 장정이었다. 경숙이 화들짝 놀라 일어선다.

"참! 내 정신 조까 봐라 이. 근디 뭇이 줄 것이 있어야제. 혹시 술 먹을 줄 알란가?"

"허허이! 아직도 우리를 깐난 애기로 보는 갑네 이."

"하이고! 알았어. 알았은게, 쪼끔만 지달리드라고 이."

반쯤 남은 한 되짜리 소주병과 김치가 들어왔다. 술병을 잡은 용철이 한 잔씩 돌렸다. 두어 순배 돌고 나자, 제법 취기가 올라왔다. 게슴츠레해진 눈을 크게 뜨고 주희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처녀티. 한 살 위인 그녀를, 여태껏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취기 탓이었을까. 오늘따라 시선은 자꾸 불룩한 가슴께로 향했다. 자신보다 작아 보이는 몸집 역시, 생뚱맞게 욕정을 자극했다.

"태민이 너, 신흥고등학교 들어 갔담서야?"

뜨거운 눈길을 피하려는 듯,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음에도, 태민은 한참 동안이나 허둥댔다.

"응? 그냥 그렇게 됐어. 근데 여기서 왜 학교 이야기가 나오냐?"

"머심애는. 내가 신흥여고 다니는 줄 몰랐냐? 나는 니가 제광고 들어갈 줄 알았지야."

푹 내려앉는 느낌. 그랬구나. 같은 재단 소속의 학교에 다니게 되어 반갑다는 의미와 함께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로구나. 맞아. 주희는 이제 2학년 올라가겠구나. 하지만 어떻든 짜증이 났다. 요즈음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도, ‘고등학교’ 말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곤 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친구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누구 기죽일 일 있냐?’ 할까봐 내색을 하지 않던 참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암초를 만나다니. 두 사람의 대화가 막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방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다시 왁자지껄.

밤이 이슥하여 마지막으로 건배를 하려는 순간. 문 밖에서 기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거대한 체구 뒤편 어둠 속에서 노려보는 눈초리, 눈초리들. 호스트 격인 경숙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메! 진성이. 자네가 어쩐 일인가?"

"어째? 우리가 못 올 디 왔는가?"

앞 중앙에 서 있던 '진성'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큰 키와 당당한 체구,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보스'임을 웅변해 주고 있었다. 뒤이어 배지도, 이름표도 달리지 않은 검정교복을 걸친 채, ‘똘만이’ 하나가 들어왔고. 그는 상의 왼쪽 호주머니에서 숟가락을 꺼내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탁탁' 내려치기 시작했다. 분명 그것은 조소와 협박의 제스처일 터, 뱃속에서 역한 것이 올라왔다.

"어이! 경숙이. 자네들... 그럴 줄 몰랐네."

"오메이! 우리가 어쨌다고 그래? 이 사람들, 우리 국민학교 동창들이여어. 오랜만에 멀리서 왔넌 디, 자네들 같으먼 그냥 보내겄는가?"

여자아이들과 안면이 있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괴한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할 일이긴 했다. 하지만 서로 말을 트고 지내는 것은 그만큼 왕래가 잦았다는 뜻이고, 이 정도의 접대(?)에 시비를 걸 정도라면 그만큼 가까운 사이임을 나타내는 것 아닌가. 묘한 질투심이랄까, 배반감 같은 것이 올라왔다. 동시에 여자아이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쪽의 불편한 심사를 눈치 챘을 뿐더러 그것을 아예 짓뭉개기라도 하려는 듯, '보스'가 본론을 꺼냈다.

"형씨들. 우리가 지끔 술을 한잔 허고 싶은 디, 돈이 웂단 말이시. 이것을 어쭈코 해야 쓰까 이?"

"..........아! 그러먼 여그..."

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철이 지폐 몇 장을 꺼내 놓는다. 아니, 이럴 수가. 마음 같아서는 그 뻔뻔스러움을 주먹 한 방에 날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는 지폐가 방바닥에 내려지는 장면 앞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야! 이건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마찬가지 아닌가? 왜 우리가 지들 술값을 내야 해? 그리고 용감하다고 믿어 왔던 용철의 행태는 또 뭐고? 타 동네까지 와서, 더욱이 여자아이들 앞에서 이 무슨 꼴인가 말이다. 그렇다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린 독 안에 든 쥐처럼, 완전히 포위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술잔이 오가는 동안, 제법 화해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얼마쯤 흘렀을까. 줄곧 말이 없던 태준이 벌떡 일어섰다.

"나, 오늘이 아부이 지삿 날이라, 가 봐야 쓰겄넌 디. 그러먼 더 놀다 오소 이."

"..........?"

누구에게랄 것도 없었다. 한마디 말을 남긴 채, 그는 번개처럼 사라졌다.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그때 보스의 제안에 따라 통성명이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눅눅한 시간, 시간들. 연신 시계를 훔쳐보던 광호가 용철에게 귓속말을 건넸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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