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배웅해 주겠다며, 여자아이들이 따라 나섰다. 소매를 잡은 채 나란히 걷는, 주희의 키가 어깨 근처에 머물렀다. 그 차이를 더욱 벌리기 위해, 발끝을 곧추세워 걸었다.

"아따. 국민학교 때는 째깐허데이, 너도 솔차히 컸다 이."

"어른한테 허는, 말버릇 조까 봐라.”

"아이고. 니가 어른이라고야? 지내가는 소가 웃겄다. 그나저나 그 그지 같은 놈들 땜에..."

"뭐하는 놈들이냐?"

"우리 허고는 다리 하나 두고 사는 염신이란 동네가 있는데, 면(面)이 서로 다른 게 학교는 우리허고 다르지야. 그런게 느그덜은 모르고, 우리허고는 옆에 있은 게 자조로 만나고 그랬지야."

듣고 보니, 별 사이도 아니로구만. 더욱이 그녀의 과장된 '분노'가 그동안의 수모와 불쾌함에 대해 조금은 보상을 해 주는 듯했다.

"근데 제일 먼저 방에 들어왔던 애... 얼굴도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고, 키도 크고 헌 놈 말이야. 그 애가 누구냐?"

"지서장인가 차석인가 허는 사람 아들인 디, 광주서 고등학교 댕기다가 짤라졌는 갑이드라. 겉보기는 말짱헌 디, 싸가지가 웂어야. 지 아부지도 걔 땜에 골치깨나 아픈 갑이드라."

"중학생복 걸치고 뽄때 없이 노는, 그 놈은?"

"윗동네 염신 사는 애긴 디, 밸 볼일 웂어. 겉멋만 들어 갖고, 아조 밸 것이여."

"그럼 지금 학교도 안 댕긴단 말이여?"

"학교는 문. 포도시 국민학교만 나와 갖고 놀면서도, 징그럽게 학생복만 입고 댕긴단 게."

도란거리다 보니, 제법 많이 걸어온 것 같았다.

"인제 그만 들어 가그라. 바람도 찬 데."

"알았어. 맘 같아서는 서촌까지 가고 싶다마는... 호호호."

황량한 논두렁 위에 선 채,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는 그들로 말미암아 마음은 많이 녹아있었다. 그러나 돌아서 걷는 동안, 잊었던 ‘수모’가 되살아났다. 야! 야밤중에 이 먼 곳까지 와서, 술을 사 주고 가다니. 그리고 지금의 이 꼬락서니도 실상 쫓겨 도망가는 패잔병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부푼 가슴을 안고 한걸음에 내달았던 초저녁의 신작로 대신, 좁다란 농로를 따라 걷는 바로 이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구나. 좁고 헝클어진 이 길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닮아 있고.

가슴 저미도록 눈부신 보름달이 잡초마저 얼어붙은 논두렁 위를,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 빛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요절한 가수의 노래를 누군가가 선창(先唱)했다.


"네온 불이 쓸쓸하게..."

꺼져 가는 삼거어...어리...

이별 앞에 너와 나는 한어어...없...이 울었다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모두들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중간 대목에서는 반항하듯,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썼다.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다리에 힘이 솟았다. 누군가가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아이들은 바람 속을 힘차게 내달았다.

백신과 한성 동네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수문(水門). 기적처럼 나타난 한 떼의 아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선봉장은 태준.

"어째 인자 오냐?"

"잠자는 놈들 투드러 깨니라고 그랬지야아. 시방 그 새끼들, 다 가 버렀으끄나?"

용철과 태준의 대화에 태민은 어안이 벙벙해졌고, 둥그레진 눈으로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태준의 뒤로 작대기와 곡괭이, 낫과 삽, 군대용 대검으로 무장한 용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쇠붙이들이 달빛에 번뜩였다. 성미 급한 철중이 으르렁거렸다.

"그 새끼들, 시방 어디 있냐? 느그덜이 다 맞어 죽는닥 해서, 자다가 눈꼽도 안 띠고 쫓아왔넌 디, 시방 어디 있냐고? 이씨벌 놈들을, 아조 자근자근 볿아 버릴란 게."

"글 안해도 요새 주먹이 근질근질 허데이, 아조 잘 되아 버렀어. 씨벌! 오래간만에 몸 조까 풀어야제.”

분기탱천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유치하게도 찔끔 눈물이 났다.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숨죽이며 살던 시민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입성하는 유엔군을 만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패색이 짙은 전장(戰場)에서 지원부대를 맞이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기중은 하늘 높이 곡괭이를 들어 올렸고, 흥식은 달빛을 향해 낫을 치켜세운다.

"씨벌 놈들, 요놈 갖고 모가지를 비어 버러야제."

"즈그 새끼덜은 뱃가죽에 철판 깔았디야? 씨벌! 요놈 갖고 쑤새 버리먼, 톱니가 꺼꾸로 되야 있어서 잘 빠지도 안 해야."

군대용 대검을 쓰다듬으며, 종국이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눈에 쌍심지를 켠 그들의 몸에서 물씬 피 냄새가 풍겼다. 혹시 이러다가 나마저 살인자의 대열에 끼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고등학교 입학은 어떻게 되고? 내 인생은?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발 낫이나 칼, 쇠붙이로 된 것들만이라도 이 수문 밑에 두고 가자!

스무 명 남짓의 ‘보복 원정대’가 논두렁을 따라, 진격을 개시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구보속도를 높여 주는데, 새삼스런 분노가 가슴께로 밀고 올라왔다. 물론 이 무지막지한 녀석들이 생각하는 ‘정의’라는 개념의 실체가 애매모호하고, 그 분노 역시 적정수준을 한참 넘어서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우정’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다.

'가자! 이 힘과 에너지를 모아, 저 오만한 무리들을 소탕하러. 선을 수호하고 악을 응징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자.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적진을 향해 공격 앞으로!'

힘이 솟고 에너지가 용솟음쳐 오는 느낌. 땅속 깊은 곳에서 용트림을 시작한 화산이 그 불꽃을 산꼭대기 위로 뿜어내고, 진득진득한 마그마를 계곡으로, 골짜기 아래로 콸콸 쏟아 내고 있었다.

그래. 내 인생이라고 하여 내 뜻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에 내 몸을 맡기자.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전의(戰意)가 온몸을 조여 왔다. 부르르 떨려오는 육신을 불끈 쥔 두 주먹으로 진정시켜 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머릿속에는 머지않아 전개될 소탕작전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그에 따라 감정의 파고는 점점 높아만 갔다. 태민은 전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체험이 눈앞에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의분으로 똘똘 뭉친 '정의의 토벌대'가 벌판을 질주하는 장면, 그것은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동네 입구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예닐곱 명씩 세 조로 나누어, 공격로를 달리 잡았다. 태민의 조는 애초에 불씨를 제공했던 경숙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태준이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나 녀석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방바닥을 쓸고 있던 경숙과 문옥이 멀뚱하게 쳐다본다. 말없이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설마 그 사이 정보가 새 나간 것은 아니겠지?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 불이 켜져 있는 집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물론 외부로 통하는 길목에 경계조를 배치하고 난 후였다.

"저 쪽에 그 놈들이 모여 있단다."

다른 조에 속해 있던 기중이 정보를 제공해 왔고, 아이들은 즉각 동네의 서쪽으로 내달았다. 대문 근처의 사랑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똘만이’ 패거리가 희멀건 눈으로 쳐다본다. 녀석들의 손에는 화투장이 들려 있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돌발 사태에 취기가 싹 달아난 듯, 붉어진 눈들이 공포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큼 들어선 토벌대, 펼쳐진 이불 위에 펄로 범벅이 된 스파이크와 장화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한 녀석이 태민의 얼굴을 알아보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씨벌 놈이 허파에 바람 들었나. 웃기는 왜 웃어?"

턱을 스파이크로 돌려 차는 순간, 녀석이 얼굴을 감싸며 거꾸러진다. 이불 위로 흩어지는 피, 피.

이 발길질을 신호로 몽둥이가 춤을 추고 작대기가 허공을 갈랐다.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방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부엌문을 통해 달아나던 녀석이 마당의 경계 조에 의해 붙들렸고, 절구통에 거꾸로 쳐 박혔다. 얼음이 깨지며 고여 있던 물이 밖으로 튀었다. 공포에 질린 대다수의 아이들은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동네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신중을 기하자며 아이들을 다독이던 태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흥분의 선봉에 서고 말았으니. 자신의 몸속 어느 구석에 그러한 야만성이 들어 있었는지 스스로도 경악할 지경. 영구는 허둥대는 똘만이의 머리통을 작대기로 내리쳤다.

"야, 이 새끼야. 느그들허고 같이 있든 놈들... 시방 어디 있냐고?"

"우리는 잘 모른 디요. 우리끼리만 요로코 남었는디요. 형씨...”

"이 개새끼는 말끝마다 형씨, 형씨. 야이 새끼야. 내가 어쭈코 해서, 느그 성이냐? 이런 싸가지 웂는 새끼야!"

"아이쿠..."

면상을 거머쥔 채 거꾸러지는 똘만이. '깃털'보다는 '몸통'을 찾아내야 한다는 조바심에 조무래기들과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방을 빠져나오는데, 골목을 지키던 경계조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마당 한쪽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달아나던 두 녀석이 끌려왔다. 그들을 향해 기중의 몸이 날았고, 배통을 채인 한 녀석이 뒤로 발랑 넘어졌다. 다른 녀석의 복부는 주먹으로 강타되었다. 배를 움켜진 채 나뒹구는 그 등을 향해 철중의 오른발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린다. 또다시 뒤로 자빠진 녀석의 목을 철중의 장화발이 꾹 눌렀다. 캑캑거리며 손을 내젓는 녀석 앞에서 철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 이 놈오 새끼. 좋게 살고 싶으먼 말해. 나머지 놈들, 다 어디 갔냐고?"

"캑! 캑!... 혹시나 거그 있을랑가 모르겄소 이."

"어딘 디? 새끼야!"

"쩌-쪽 다리 건너 갖고, 첫 집이라우."

그는 턱으로 염신 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백수면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달리하는 곳, 염산면에 속해 있었다. 마당을 막 나서려는 순간. 바로 근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놈 잡아라!"

핏발선 눈에,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오는 서너 개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짚가리 옆에 세워져있던 작대기를 집어 들고 뒤를 쫓았다. 달음박질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태준이 한 걸음 앞서 뛰었고, 그 뒤로 용사들이 대열을 이었다. 녀석들은 큰길로 빠져나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네 한가운데에 자리한 작은 다리를 건너 가파른 언덕길로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큰 다리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두 면(面)의 구분선이기도 한 그곳을 지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의 동네가 웅크리고 있을 터. 일제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대교(大橋)위로, ‘악당’들이 죽을힘을 다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고 있었다.


by 겅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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