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강물 위에 활 모양으로 얹혀있는 다리. 그 오르막을 뛰는 동안 태민은 스스로 활극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목숨을 걸고 탈주하는 도망자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뒤를 쫓는 추격자들, 그리고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물 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긴 그림자들. 아! 이 드라마틱한 장면이라니.

우리는 선하고 정당하다. 우리는 악의 무리를 응징하기 위해 내닫는 정의의 군사들이다. 누가 감히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손가? 오! 이 감격, 이 황홀함이라니. 오르가즘보다 더 진한 감동이 전신(全身)으로 퍼져나갔다. 어떠한 소설이나 영화도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극적일 수는 없으리라.

다리를 건너자 길 왼쪽 둑 위에 외로이 서 있는 가옥 한 채가 나타났고, 추격자들의 눈은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가는 두어 개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무라리 토벌대는 그 집을 삥 둘러쌌다. 울타리도 없이 맨땅 위에 덩그러니 얹혀있는 집이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머리에 이고,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이 전부. 물론 마루도 없었다.

방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슬그머니 문고리를 당겨 보았다. 안쪽으로 잠겨 있었다. 태민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에 힘을 보태려는 듯, 옆에 서 있던 기중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무응답. 이번에는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반대편에서 문고리를 꽉 잡고 있다는 느낌이 손으로 전달되어 왔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기중이 작대기를 들어 문을 내리쳤다. 위에서 아래로 창호지가 갈라지며 동시에 문살이 부러졌다. 태민의 오른발이 문의 한 중앙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아직도 문고리 근처는 요지부동. 급한 때일수록 침착해지는 태준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고리를 딴 다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서북쪽 창을 통해 찬란한 달빛이 쏟아진 탓일까. 정면 시야가 가려졌고, 그 때문에 덩그런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 없다 여기며, 안쪽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바로 그때, 오른쪽 구석에 장대같이 서 있던 새까만 그림자가 힘없이 무너졌다.

"아이고! 형씨들, 잘못했소. 제발 살려만 주시오!”

뜻밖에도 그는 보스였다. 털썩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기 시작하는 적장(敵將) 앞에서, 토벌대는 도리어 어리둥절해야 했다. 기대 이상의 대어(大魚)를 낚았다는 감격보다도 한 인간의 이중성 앞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온갖 폼을 다 잡으며 호기롭게 위협할 때와 이렇게도 딴판이라니. 두 손 모아 싹싹 비는 폼이 너무나 비참해 보였다. 아! 우리는 지금 한 인간이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 그 현장을 보고 있다!

기중의 손에서 작대기를 빼앗은 태민은 냅다 아랫도리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마구 휘둘러 댔다. 이 개자식! 초저녁 우리 앞에서 기고만장하여 공갈 협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릎을 꿇어? 너도 보스냐? 너도 인간이냐고? 내 앞에서 성인군자처럼 굴었던 경진이 형도 별 것 아니더라. 천사처럼 보였던 남영순 선생도 그렇고 그렇더라. 일류 고등학교에 부정으로 들어간 놈들도 쌔고 쌨다드라. 이 세상이 왜 너처럼 더럽고 야비한 인간들로 채워져야 하는 거니? 왜 너 같은 놈들이 큰소리치며 살아야 하느냐고?

그것은 천하고 비굴한 인간존재에 대한 환멸, 증오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풀리지 않는 태민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항거, 분풀이였다. 누군가가 손을 붙잡았다. 있는 힘을 다해 뿌리쳤다. 녀석은 맨땅에 나뒹굴며 두 손을 높이 모아 싹싹 빌었다. 그 하소연이 너무나 애절하여 가히 보는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바로 그 이중성에 치를 떠는 태민으로서는 그 장면이 더욱 가증스러워 보였다. 타작이 멈추어지지 않자 보다 못한 신욱이 작대기를 붙잡았다.

"인자 그만해라. 되얐다!"

대여섯 살이 많은 그의 음성에는 '오야봉'의 위엄이 묻어났다. 서울에 가서 복싱 도장에 다니기도 했다는 그는 우연히 오늘밤 토벌대에 합류했었다. 나이로 보나 주먹으로 보나,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그의 권위에 복종하자는 것이 토벌대의 묵시적 합의사항이었다.

"너. 이 자식!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형님만 아니었으면 너는 죽었어."

"예.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너 혼자 뿐이냐? 아까 너 말고, 또 한 놈 들어왔잖아?"

체통과 자존심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녀석의 턱이 부엌 쪽을 가리킨다. 아뿔싸! 문이 열려 있었구나. 후다닥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고요히 잠들어 있는 강변 마을의 밤하늘을 갈랐다.

"쩌그다! 쩌그. 한 놈 도망친다. 잡어라!"

"아따! 상놈오 새끼, 쥐새끼같이..."

내리막길을 따라 아래쪽 동네로 접어드는 그림자 하나가 달빛에 선명히 비추어졌다. 에라이! 니 놈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별 수 있냐? 그러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그림자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대여섯 명이서 근방을 포위한 다음, 골목 끝에 위치한 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마당과 헛간, 변소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곳은 안방뿐. 서너 명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마루에 올라섰다. 종국이 문고리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야! 문 열어. 빨랑 안 열어?"

물론 본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 아니면 갈 데가 없다는 데에 모두의 심증이 일치해 있었다.

"문 빨리 안 열래?"

두 번, 세 번의 독촉에도 무반응. 쥐 죽은 것 같은 침묵에 도리어 이쪽의 숨이 막혔다. 드디어 인내의 한계를 드러낸 작대기가 문살을 갈랐고, 성난 발들이 문짝을 걷어찼다.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안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내복 차림의 남자는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고, 아직 새색시 티가 가시지 않은 여자는 가슴팍 부근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 무슨 난리속인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눈망울은 각목과 작대기, 펄로 범벅이 된 신발들 앞에서 심하게 흔들렸다.

순리를 따지면, 놀란 가슴들을 진정시키고 정중하게 협조를 구해야 마땅할 상황. 하지만 복수심에 이글거리는 원정대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밤중에 안방을 침범한 것 자체가 벌써 순리를 한참 벗어나 있었으니. 태민의 마음 또한 ‘순리’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었다. 비 맞은 새처럼 두려워 떠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도리어 어떤 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 잔인한 정복자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약자 앞에서 한껏 군림하는 이런 통쾌함을 맛보기 위해 사나이들은, 영웅들은 목숨을 거는 걸까? 안방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부엌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아! 찾았다."

"이 새끼. 이리 안 나올래?"

종국과 기중이 부엌문을 박차며 뛰쳐나갔고, 태민은 태준의 뒤를 따라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안방에서 빠져나가 부엌 옆 헛간에 숨어있던 녀석이 뒷덜미가 잡힌 채 끌려 나왔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뒤통수를 몇 대 쥐어박았을 뿐, 더 이상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컷 화풀이를 한 끝이어서였을까, 벌써 오르가즘을 경험해 버린 다음이라서 그랬을까. 욕정과 많이 닮은 분노, 그 끄트머리에는 관대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처럼, 개선장군처럼 아이들은 보무도 당당히 둑길을 걸었다.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고 나니, 배설을 마친 어린아이처럼 짜릿한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세상에 이렇게도 가슴 벅차고 아름다운 밤이 또 있을까. 몸은 날아갈 것만 같고,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초저녁부터 자정 무렵까지 이어진 지루한 신경전, 그리고 곧 벌어진 야간전투로 인하여 심신이 피곤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승리를 거머쥔 마당에, 무라리의 성가(聲價)를 한껏 드높인 쾌거에 몸과 마음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새 힘이 돋는 듯했다. 다시 한 번 전장(戰場)에 나가라 해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의외의 저력과 단결력에 놀란 쪽은 도리어 원정대 자신들. 우리 몸속에 이런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무라리 촌놈들의 영혼 가운데 이런 에너지가 들어 있었다니. 그래. 어떻든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과연 이런 날이 얼마나 될까.

서촌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곯아 떨어져 있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씨 부부가 잠들어 있을 가겟방을 한 번 쳐다본 다음, 태민은 고양이 걸음으로 넓은 마당을 지났다. 달은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새방에는 언제나처럼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자리에 눕는 순간, 행복감이 밀려왔다. 불과 며칠 전. 이곳에서 맥주 세 병으로 자살소동을 일으켰었는데. 그땐 그랬어. 하지만 죽긴 왜 죽어? 이렇게 좋은 세상을 왜 떠나려 했느냐고?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잠은 오지 않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가슴이 뛰어서 그러나? 아님 불안해서?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이제 잠을 자자. 고놈들이 애당초 잘못했잖아? 그러니까 벌을 받은 거고. 우리는 무죄야.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벌벌 떨던 부부 생각이 났다. 그 못된 악당들은 그렇다 치고, 과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인가? 바늘로 심장이 쪼이는 기분. 아니야!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한 것 같아.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일이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한시바삐 잠이 들어야 한다는 것. 이럴 때는 차라리 심장에 철판을 깔자! 정복자의 체질을 닮자! 입시에 실패하고 자학(自虐)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를 꾸짖지는 말자. 이제 그런 일에는 진저리가 난다.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이 탈이야. 너무 나약한 게 병이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이 재수가 없었던 거야. 재수에 옴이 붙어서 그런 거라고.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불운 때문에 죄 없이 죽어 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몰라? 전사(戰士)처럼 당당해지자. 지배자의 마음을 닮아 잔인해지자. 아니, 그래야 한다!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그냥 참았더라면 오래도록 치욕으로 기억되었을 이 밤에, 승리의 트로피를 안고 잠자리에 눕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잖아?'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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