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소망과는 달리, 이튿날 동네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망나니들 입장에서 말이 좋아 '응징'이고 '정의'이지, 어디 그것이 가당키나 한 짓인가? 야밤중에 온갖 연장으로 무장하여 집단 패싸움을 벌이다니. 아니, 패싸움이라기보다 집단 폭행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도 민가를 들쑤시고 다니며, 미처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한 상대방을 습격하여 초죽음을 만들어놓았으니. 일부 어른들 사이에서는 후련하고 대견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대세는 너무 황당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보스'의 부상정도가 심하여 지서장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태민은 사태의 심각성과 스스로의 잔인성에 비로소 몸서리를 쳤다.
자신이 직접 손을 봐 준(?) 자들만 줄잡아 십여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보스의 경우, 작대기로 맞은 흔적이 온몸에 파란 멍으로 박혀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이라니. 아! 도대체 내 안의 어디에 그토록 잔혹한 야수성이 숨어 있었을까?
이씨가 김씨를 두들겨 패던 그 현장에서 온몸을 엄습해 왔던 증오감과 적개심, 절대로 그를 닮아서는 안 된다며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어느새 부전자전(父傳子傳)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평소 주변에서는 순하고 착한 아이로만 알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되먹지 못한 행태란 말인가?
고입 낙방에 대한 분풀이이자 자신을 거부하는 이 세상에 대해 항거했노라고 말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사건은 그런 고상한 말로 포장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보다 못한 저급한 야수성의 표현이자 치졸한 복수심의 발로일 뿐, 그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가? 삶의 끝자락에서 과연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뭐라고 고백할 것인가? 심영진 선생님, 자신에 대한 기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그가 미워 그 앞에서 저항의 몸짓을 보인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눈 속을 헤치며 장성 고향집에 머물고 있던 그를 찾았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에 미국 작은 이모님이 보내온 긴 바바리코트를 걸친 채, 태민은 초등학교 은사 앞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 댔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그 앞을 말없이 물러 나왔다.
'본래 나는 이런 놈이어요. 이제 더 이상 나 같은 놈을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끝난 놈이어요. 당신의 시선이 부담스럽단 말이어요.'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감의 포기였다. 그것은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삶에 대한 회한(悔恨)이었다. 맥주 세 병 사건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백신 사건은 타인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등등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소금물에 절인 배추 포기인 양 서촌 아이들은 그렇게 오그라들었고,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태민 역시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일찌감치 광주로 올라왔다. 허나 점점 다가오는 입학식 날이 문제였다. 그러잖아도 후기 고등학교를 탐탁지 않게 여겨오던 터에 백신 사건마저 겹치고 보니,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그것이 싫다고 하여 거부될 수 있는 일인가?
가장 가슴을 졸인 부분은 역시 지서장 아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찾아다니는 그 아비를 생각하면 밥맛이 삼천리나 떨어졌다. 아! 이 일을 어쩌나?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어렸을 적 일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기중과 함께 대통령 고누를 두다가 녀석의 손톱을 찍어 버렸던 그 사건 말이다.
홰를 치던 어미 닭과 꿀꿀거리는 돼지, 초가집 지붕 위에 얹혀있던 호박, 맴맴 거리던 매미소리와 함께 녀석의 검붉게 물들어가던 손톱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의 죄가 덮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때에는 하나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실수가 아닌, 엄연한 죄악이다.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기 마련. 만일 지서장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다면, 나는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아닌가.
운명의 개학일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밥상 앞에 앉았다. 모래알을 씹는 기분.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의관(衣冠)울 정제하였다. 말쑥한 새 옷, 검정색 학생복을 걸치고 하얀 테가 둘러쳐진 모자를 지끈거리는 머리통 위에 얹고, 가늘게 떠는 왼손에 가방을 들게 한 다음, 거울 앞에 섰다. 의젓하고 늠름한 모습. 만약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생애 최고로 상쾌한 아침이 될 판인데.
대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에게 낚아 채일 것만 같아, 주위가 두리번거려졌다. 만일을 대비하여 하숙집을 옮기긴 했으되, 혹시 아는가? 그 사이에 수소문해놓았는지. 수갑이 채워진 채 멱살이 잡혀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비록 일류 고등학교는 아니지만, 미래를 꿈꾸며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던 이 날이 인생에 '오점'을 찍는 날로 자리매김 될 줄이야.
돌이켜 보니 그날 밤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잘 써진 비극의 시나리오처럼 여겨졌다. 정월 대보름날. 느닷없이 그곳에 갈 생각을 해 낸 일부터 운수 사납게 '똘만이' 일당을 만난 일, 아버지 제상에 술을 따르는 대신 동네 아이들을 깨워 온 태준의 빗나간 복수심, 그리고 잠결임에도 제법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무라리 아이들의 무모한 열정.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결국 오늘의 비극으로 완성되었으니.
'수문에서 아이들과 맞닥뜨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좀 더 설득을 했더라면, 그 일당들이 일찌감치 헤어져 흩어졌더라면, 우리 편 아이들이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그들을 만났을 때 가벼이 뺨이나 한 대 때리고 돌려보냈더라면, 나에게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본들, 소용없는 일. 이왕 잡힐 바에야 학교 정문보다는 골목길처럼 으슥한 곳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낭패를 당하느니, 맞아 죽을망정 혼자서 당할 수 있다면 그쪽을 택하고 싶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닮아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가방을 쥔 손에 짐짓 힘을 가해 보았다. 그러나 몸에서 기운이 온통 빠져 나가버린 탓인지, 꽉 잡혀지지 않았다. 내가 허깨비인가? 유령인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가? 확인해 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프다. 아무래도 피가 난 것 같다.
'그래. 나는 분명 살아있고, 내 앞에 주사위는 벌써 던져졌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비굴하게 살기보다는 용감하게 죽는 쪽을 선택하자!'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팔을 힘차게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걸었음에도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용사 앞에서는 운명마저 고개를 숙이는 법인가. 빛이 나아가니 어둠이 물러가는 건가?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의 모습일랑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좁다란 골목길에도, 넓은 거리에도, 그리고 제일 가슴을 졸였던 학교 정문에도. 지서장이나 그와 비슷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교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는 순간, 적어도 오늘만큼은 무사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전신 전화국으로 달려갔다. 신청 용지에 전화번호를 적어낸 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김씨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태민 손님, 3번으로 들어가세요! 화들짝 놀래어 직원이 가리키는 부스 쪽으로 달려갔다.
"응. 너냐? 어쭈코 하숙집은 앵기기나 했냐?"
"예. 근데... 그보다 동네는 어떤 가요?"
"응? 첨에는 난리라도 날 것 같데이, 누가 있어야제. 느그 친구들 중에 서울로 간 아그도 있고, 부산으로 가기도 허고, 또 누구는 즈그 외갓집도 가고 그랬는 갑이드라."
"그래요?"
"동네가 절간같이 조용허다. 앞으로 밸 일이야 있겄냐마는, 암튼 몸조심해라. 느그 아부지가 지서장한테 말은 했는 갑이드라마는..."
"정말이요?"
"계를 같이 허는 갑이여어. 그래서 백신 말을 했데이 꺽정도 마라고, 즈그 아들도 쪼까 껄렁껄렁해 갖고 골치가 아프다고. 여그 저그 소문나는 것이 싫은가 어찐가, 나머지 다른 집들까장 다 따독기릴란다고 앨라 그러드란다. 그런게 이만치나 조용허제, 글 안허먼 느그 놈덜 콧물도 웂어. 함바트라먼 다 징역 갈 빤 봤단 게."
".........."
"좌우간 느그 아부지 앞에서는 딸싹 못헌 갑이여어. 느그 아부지가 승질이 급허고 식구들한테 쪼까 펄펄해서 그러제, 배까테 나가먼 인물이란 소리는 듣지야. 너한테도 겉으로 표현을 안 해서 그러제, 을마나 애끼는지 아냐? 너 시험에 떨어졌을 때, 본인 속이 더 상해도 니가 낙심허까 봐서 내색도 못허고. 방학 중에 니가 밤늦게 돌아댕기고 비칠거리고 댕개도, 내비 두고 본 것이여어. 이참에 들어간 고등학교가 후기 중에서 젤 좋다고 사람들한테 또 을마나 자랑을 허고 댕기는지, 듣고 있으먼 숨이 다 찰락 헌다고... 누가 와서 숭을 보드라."
"..........”
"인자 정신 채리고 공부 부지런히 해야 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전화비 많이 나온 게, 싸게 들어 가그라."
by 강성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