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기
몸이 나른해지며 눈꺼풀이 무겁다. 벌써 춘곤증이 찾아왔나? 헐렁한 팬티를 입고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채, 백 미터 경주의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 느낌. 운동화 끈을 질끈 매기도 전에 총소리가 울렸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허둥지둥 달려 나가는 형국이었다. 홧김에, 자학하는 심정으로, 놀이쯤으로 간주하여 치른 시험인지라 입학성적이 형편없을 거라 짐작하고 있던 터에, 우수반에 편입된 것은 의외였다.
그렇다고 하여, 미끼에 낚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학교생활에 충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일은 스스로를 후기 고등학교 입학생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종의 항복을 의미할 것이기에. 몸은 비록 여기에 담고 있으되, 마음만은 일류 고등학교 학생이고 싶었다. 그러나 본시 겁이 많고 담이 약한 탓에 지각이나 결석을 드러내 놓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구와 싸운다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없었다. 대신 혼자서 태업(怠業)을 벌였다.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임했고,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공상으로 때웠다.
'아! 이제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 미래라거나 꿈이라거나 하는 단어들에도 넌더리가 쳐진다.'
나는 지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와 있다. 나는 지금 만날 가치도 없는 녀석들을 친구로 삼고 있다. 내 인생은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한탄하고 불평하며, 두어 달을 보냈다. 시험? 이류 고등학교에서 시험은 무슨. 진지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으며, 장난삼아 본 4월말 고사의 성적은 꼴찌에서 두 번째. 아! 내가 드디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유명한 '꼴찌에서 두 번째'도 해 보는구나.
그런데 내 뒤에 또 한 사람이 있다니. 세상에! 그 사실이 놀랍구나. 대체 그 녀석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담임은 둘을 맨 앞자리 중앙에 나란히 앉혔다. 하도 신통하여 짝꿍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래도 어딘가 모자란 것만 같은 표정. 푼수? 모지리(머저리)? 저능아? 그렇다면 그와 나란히 앉아있는 나는 누구고? 혹시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아이로 비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거야. 훗훗. 바보들의 만남, 푼수들의 동행이라니 참 재미있구나.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녀석은 태민을 살갑게 대했다. 고독하지 않아서 좋다는 뜻일까, 선량해 보이는 이웃을 만나 반갑다는 뜻일까. 처음에는 거리를 두려 했지만, 어느새 그가 좋아지고 말았다. 순수하고 솔직한 녀석의 성품,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 태민의 마음을 풀어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 둘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아! 모두가 우리 사이처럼 될 수 있다면. 클래스메이트를 경쟁자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 여길 수만 있다면. 그런데 이 '평화’에 찬물을 끼얹는 작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담임.
그는 아침 조회 때나 오후 종례 때 둘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마치 일수라도 찍듯이, 볼펜으로 탁탁 머리통을 두드리며 조소를 보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조금 성가시긴 해도, 이류 고등학교 교사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보다는 이편이 차라리 낫다 여겼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진지해지면서, 비웃음은 어느새 비난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 무렵,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마저 입시낙방에 대한 대가라면 너무 심하지 않는가? 왜 이 학교 교사까지 나를 조롱하는가? 왜 내가 그런 수모를 당해야만 하는가? 그보다 이러다가 정말 내가 열등생으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이류 고등학교에서조차 일류 학생이 되지 못한다면? 은근히 겁이 났다. 꼭꼭 숨겨두었던 실력을 스스로 점검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맘을 잡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5월의 중간고사 때에는 반에서 5등의 성적을 받아 뒷좌석으로 물러났다. 물론 다정한 짝궁 상수는 이별을 대단히 아쉬워했다. 불쌍한 녀석.
"여러분! 이태민이가 이번에 5등을 했어요. 여러분도 태민이처럼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지요. 선생님이 태민이를 자꾸 때리고 뭐라 한 것은 에... 노력하면 될 아이인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어요. 그러므로..."
개똥이나, 지랄하고 자빠졌네. 노력은 무슨 노력.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던데 뭘. 영어 담당 교사는 자기의 교직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영어에서 만점이 나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무렵 지능지수(I. Q) 테스트 결과가 나왔는데, 학년 전체에서 가장 높은 138이 나왔다며 역시 담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뭐? 내 머리가 좋다고? 웃기고 있네. 결국 이런 식으로 영웅신화가 만들어지는구먼. 이렇게 하여 전설이 생겨나는구먼.'
태민은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IQ 테스트 방법에 문제가 있었든지, 그 답안지를 모아 채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든지, 시스템 자체에 이상이 있었든지. 왜냐하면,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이 시험마다 떨어질 수는 없을 것이기에. 다른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가 입시 결과로 나타났기에.
하지만 맘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교만이 싹터 올랐다. 이상하게시리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는 우쭐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노트 정리를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2학년 수학 시간, 드디어 담당교사인 담임에게 걸려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이 자식이 개판으로 학교 다닌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두들겨 패는 그 앞에 혼절하여 거꾸러지고 말았다. 무지막지한 '독종'은 태민의 행태를 구실 삼아 학년 전체에 대해 노트 검사를 실시했고, 적발된 아이들은 흥분된 매타작의 희생물이 되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들은 사건의 '원흉'을 원망했을 테고. 아! 조용히 그냥 묻혀 다니려 했는데, 드디어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하지만 태민은 이때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도리어 항거했다. 아니, 필기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 그냥 따 담으면 될 거 아니야? 공식을 알고 외우면 끝나는 거 아니냐고? 성가시게 노트에 적고, 그걸 갖고 다니며 들여다볼 필요가 뭐 있냐고? 근데 때리긴 왜 때려? 씨발!
그날부터 수학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대신 영어를 포함한 다른 과목들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학입시가 중요하다 하면서도 학교에서는 야간학습을 시키지 않았다. 방학 때에도 학교에 잡아두는 일은 별반 없었다. 학원이나 과외 공부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방학은 무라리 차지. 그리고 무라리에서의 시간들은 반항과 욕정, 비행(非行)으로 얼룩졌다.
"가시네덜 한테는 말이 필요 웂어야. 찬스가 생갰다 허먼, 무조건 자빨쳐 놓고 봐 버러야 해. 첨에는 어떤 가시네든지 안 된다고 허제, 누가 된다고 허겄냐? 아무리 울고불고 허다가도 일단 당허고 나먼, 고분고분해지는 것이 여자들이그든."
태준의 표정은 사뭇 의기양양했다. 어쩌면 새 잡는 일과 더불어 여자아이들을 후리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별종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여자애들을 따먹는 일(?). 또한 가장 듣기 괴로운 말 역시, 누군가로부터 그 일에 대한 ‘무용담’을 듣는 일이었다.
“근디 가시네들마닥 다 틀려야. 우게가 붙어 있는 년도 있고, 밑에 쪽에 달린 년도 있고. 쫄깃 쫄깃헌 맛도 있고, 밍밍헌 맛도 있고. 어뜬 년은 그 통에도 밑에서 쌕을 쓰는 년이 있고, 어뜬 년은 송장같이 카마이 엎어져 있는 년도 있고. 근디 젤 재수 웂는 년이 누구냐먼... 털이 하나도 웂이..."
무궁무진하고 기기묘묘한 그의 경험담은, 늘 군침을 흘리게 했다. 물론 태민의 경우, 귀로만 듣고 흘려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맞게 될 기회에 대비하여, '노하우'를 배우고 축적하려 애를 썼다.
'세상사 모든 일이 노력하기에 달려있거늘, 그 일이라고 하여 예외일 수 있으랴? 그래. 나도 한 건 올려보자. 그래서 항상 우쭐대는 그의 콧대를 꺾어 보자!'
남의 이야기나 듣고 박장대소하는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 스스로 행동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각성, 그것이야말로 극적인 사고의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청춘의 끓는 피를 이대로 식힐 수는 없어. 바람둥이들이 다 먹어치울 때까지 팔짱끼고 바라만 볼 수는 없다고. 그리고 여자를 정복한다는 의미는 반드시 육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관념으로 그치는 사랑에는 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 2 때의 여름방학. 무라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암소에게 오후 내내 풀을 뜯게 하고, 밤에는 모기떼의 공격에 진저리를 치는 일뿐이었다. 바로 그때 신데렐라처럼 나타난 한 여학생이 있었으니, 이름은 이은경. 친구와 함께 영구네 집에 다니러 온 그녀 앞에서 태민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다.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그녀는 태민의 떨리는 손을 잡아 주었고, 귓속말을 내뿜으며 살포시 미소까지 보여 주었었다.
방학 내내 함께 있어줄 것으로 믿었던 그녀가 향긋한 체취만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난 날부터 태민은 집 앞 탱자나무에 올라 버스가 들어오는 동구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꼭 다시 올게. 오직 그 말 한 마디를 믿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시집(詩集) 안표지에 쓴 한 글자 '삶'이 무얼 의미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생활’이라 풀이해 주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별 뜻도 없는, 그야말로 밋밋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고상하게 느껴졌고, 그때부터 ‘삶’이라는 단어는 백 번도 더 낙서되었다. 그리고 ‘이은경’이란 이름은 천 번도 더 넘게 휘갈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편지도, 소식도 없었다.
맞아. 낭만이니 순수니 하는 말들은 그냥 지나가는 거야. 정신적인 사랑이란 강물에 쓰는 글씨처럼, 그냥 흘러가는 거야. 나의 진한 자국을 남겨야 해. 육체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고. 그 무렵부터 태민은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기적처럼 그렇게 기회는 찾아왔다.
칠산의 해풍을 막아주는 언덕빼기 산지떵 너머의 외딴 집에서, 동네 여자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초저녁부터 손뼉 치며 노래 부르기 시작하여 어느새 서너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 이젠 이 짓도 싫다. 손만 아프고, 목만 피곤하다. 무언가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어야 할 텐데..."
몸 따로, 마음 따로. 오직 관심은 이 밤에 데리고 나갈 아이를 물색하는 일에만 쏠려 있었다. 누굴 골라야 할까. 물론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서울 구경을 하고 막 내려온 '점순'이 적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몸집, 수줍어하는 미소가 맘에 들었다. 방안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밖으로 빠져나왔다. 숨을 가다듬은 다음,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려,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왜 그래? 오빠."
"쩌어기. 내가 조까 헐 말이 있어서 그런 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앞장서 걷는 동안, 부지런히 궁리해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하얀 색, 텅 빈 채였다. 오직 정복에 대한 야망으로 가슴은 온통 불바다. 해질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그쳐 있었다. 은백색으로 뒤덮인 땅, 저 순결한 대지를 내 욕정으로 더럽혀야 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망설임마저, 열일곱 살의 청춘이 내뿜는 거친 숨결에 날려 보내리라 맘먹었다.
소나무 숲 사이를 한참 방황하다가, 겨우 앉을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평평한 맨땅. 정성껏 눈을 쓸어낸 다음,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가와 앉는다.
"오빠, 왜 그래? 우리 들어가서 재미있게 놀자. 응?"
애써 명랑한 척 했지만, 그 음성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세련된 서울 말씨가 더욱 섹시하게 느껴졌다.
"쩌어기... 진작부터 말을 헐라고 했는데, 널... 사랑...해!"
"..........?"
"진짜야."
엉겁결에 튀어나간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랑한다니? 얼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일단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급선무다 싶은데, 달리 할 말도 없고 하여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참담한 느낌일 줄이야. 그 비극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여자 역시 어색한 침묵. 아니야. 어쩌면 내가 정말로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억지로 최면이라도 걸고 싶은데, 그 역시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하기야 사랑이 뭐 별 건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갖고 싶으면 다 사랑이지. 야, 임마! 그건 사랑이 아니고 욕정이라고 하는 거야. 너는 더러운 욕망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어.'
그러나 또 다른 자아의 외침.
'그렇다 한들, 욕망이 왜 더럽다는 거지? 남자가 여자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일이 왜 더러운 거냐고?'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하는 두 상념 가운데 끼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 나는 왜 이럴까? 왜 과감하지 못하고 늘 우유부단한 걸까? 안 돼. 어렸을 적부터 그토록 저주했던 소심함이 다시 활개 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 그 나약한 심성 때문에 수없는 패배를 맛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변할 때도 되었잖아? 아니, 나는 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변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밤 이 아이를 데리고 나왔던 거고. 그런데 이 대목에서 왜 망설이는가? 나는 늘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야. 즉각 행동에 옮길 때라고!
by 강성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