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 '바로 이때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태민은 절망하는 심정으로 입술을 포갰다. 어느 정도의 저항은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입안으로 혀를 쑥 밀어오기까지 했다. 도리어 섬뜩한 느낌. 그러나 이내 용기백배하여 몸을 쓰러뜨렸다. 눈이 발목 근처까지 쌓여 있었지만, 뜨거운 욕정은 그것을 녹이고도 남았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왼손으로 스커트를 끌어올렸다.

"움..."

"...가만히 있어!"

포동포동한 허벅지가 손끝에 닿는 순간, 그 황홀함에 온몸이 감전되었다. 한참을 더듬어 올라가자, 부드럽게 파인 골짜기가 만져졌다. 평소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은밀한 곳을 부릅뜬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몸을 반쯤 일으켰다. 빨간색 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혼백은 멀찌감치 달아나고 말았다. 이제는 내친걸음.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물러설 명분도 없었다.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처럼, 피 맛을 본 사자처럼 광분하기 시작했다. 1차 장애물인 팬티를 힘차게 끌어내렸다. 그러나 적신호를 감지한 상대가 한사코 손을 뿌리친다.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포획대상을 옭아매고자 하였다. 발버둥치는 두 팔을 왼손을 이용하여 뒤로 꺾은 다음, 오른 손으로는 다음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역부족. 보다 강하고 충격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판단되었다. 냅다 여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엄호 격인 욕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미리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그러고 보니, 욕과 섹스는 많이 닮아 있구나. 원색적이고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참았던 분노(욕정)를 분출시킨다는 점에서, 뱉어 버리고 나면 통쾌하다는 점에서, 대개는 폭력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럽다고 말들을 하지만 실상은 가장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격을 가한 후, 반항이 무디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적처럼 저항이 자지러졌을 때,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은 채, 팬티를 끌어내렸다. 달빛에 드러난 하얀 허벅지와 까만 국부가 한 폭의 동양화인 양, 절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황홀경에 취해 바라보는 동안, 그녀는 부끄러운 듯 한쪽 다리를 반쯤 세우며 코 먹은 소리를 냈다.

"아이! 추워 어어..."

하는 작태를 보니 벌써 마음의 빗장이 풀린 게로구나. 이제 식은 죽 먹기이겠는걸.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어 보았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나 할까. 고지를 눈앞에 두고 돌격신호를 기다리는 병사의 심정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순간을 음미하고 싶어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름다운 계곡을 들여다보았다.

'아! 나의 생애에 이런 순간이 찾아오다니.'

적병은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한 채, 백기를 흔들고 있었다. 벗어진 치마와 팬티를 멀찌감치 던져놓았다. 안전장치까지 해 두었으니, 이제 서둘 까닭이 없겠구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몸을 움직여 나갔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실습해 본 적도 없는 그 행위가 제법 능숙하게 진행되었다. 참. 열심히 공부하며 죽어라 노력해도 모르는 일이 있는가 하면, 힘쓰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 있으니 신통도 하구나.

'거시기'의 공격을 받은 그녀의 몸은 마치 폭탄 맞은 건물처럼, 스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양팔로 남자의 목을 감싸 안는 교태에 가느다란 신음까지. 감동의 진한 물결이 두 사람 사이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지난(至難)하게만 여겨지던 일이 무사히 성사된 데 대해 감격, 또 감격. 기쁨과 희열이 몸을 공중으로 한껏 부양 시켰다. 적에게 심장부를 앗겨버린 오합지졸이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고, 개선장군을 환영하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 입에서는 뜨거운 숨소리, 승리의 개가가 뿜어져 나왔다.

'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거늘, 뚱딴지같이 유신반대 투쟁이라니. 사사오입(四捨五入)이면 어떻고, 삼선개헌(三選改憲)이면 또 어떤가? 굶어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으면 되지. 총 맞아 죽는 사람, 칼에 찔려 죽는 사람 없으면 되는 거지. 내 땅, 내 집 갖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지. 미워하는 대신,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자유가 밥 먹여 주는가? 민주주의가 삼팔선을 막아 주느냐고? 이념이 육체적 욕망을 채워주는가 말이다!'

그러나 또 한편의 외침.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너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도 안 하냐? 개나 돼지처럼 먹여 주고 입혀 주면 끝나는 거냐고? 그리고 지금 이 짓은 또 무어냐?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성폭행이라니. 벌레처럼 이따위 짓에나 몰두하다니. 이 천하에 나쁜 놈아!'

혼란한 두뇌, 엉뚱하게 떠오르는 생각들, 끝 간 데 모를 공상,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어머니, 입시, 심영진 선생님, 아버지, 하숙집 밥 등. 무아지경을 헤매는 동안에도 온갖 상념들이 머리를 스쳤다. 아! 이 열락의 순간에도 세상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과연 온전한 엑스터시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인가? 어떻든 오늘밤의 이 사건이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흔적이 남아야 할 것 같았다.

'껍데기만 합쳐져서는 안 된다.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더 이상 아까울 것이 무언가? 이대로 죽는다 한들 두려울 게 무엇인가? 그래서 바로 이 순간, 마지막 남은 한 방울, 최후의 에너지까지 다 쏟아야 한다.

'혹시 아이들이 우릴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 들키면 어쩌지?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이 아름다운 시간을, 사소한 일로 방해받고 싶진 않다. 이 순간, 모든 판단을 중지하자.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괄호 속에 집어넣자. 사람들이 몰려나와 내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할지라도, 나는 자연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이 거룩한 행동을 결코 멈출 수 없다. 억지로 두 몸뚱이가 잡아 떼인다 할지라도, 그 전에 사정(射精)까지의 온 과정은 기필코 마무리되어야 한다!'

어떤 영화 속 전쟁의 폐허 한가운데에서, 남녀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이 숭고한 작업을 끝내 마무리했었다. 아! 경진이 형도 그처럼 다급한 심정이었을까? 씨앗을 뿌리려, 이 땅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그날 밤 그토록 발버둥을 쳤을까? 그리고 그렇게 홀연히 떠나갔을까?

그는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은 병사(病死)라 했고, 어떤 이는 자살이라 했다. 그 어느 쪽이든,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맞아. 그렇고 보면, 삶과 죽음은 한 뼘 차이야. 성(性)은 그 둘과 많이 닮아 있고.

밤 깊은 시각.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인적(人跡)이 있을 리는 만무. 그러나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칠산 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과 별을 품은 하늘이, 땅위에서의 소나무들과 함께 둘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적어도 고발당할 염려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때로는 무심(無心)한 것들이 우리들 삶을 편안하게 해 주는 법이지.'

맑은 하늘에 바람은 세찼고, 여자의 몸은 뜨거웠다. 그 아래에 깔린 눈을 녹여내기라도 하려는 듯, 엉덩이는 한껏 달구어졌다. 삭풍(朔風)이 수컷의 등 위로 환호하며 지나갔지만, 둘의 육체는 결코 식지 않았다. '난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아요'라고, 여자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숨이 점점 가빠질 무렵, 여자가 슬쩍 엉덩이를 들어 주었다. 그녀의 친절함에 감격했다. 하지만 또한 서툴지 않은 그 몸짓에, 그만 슬퍼지고 말았다.

애당초 '처음'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확신되는 순간,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었다. 남자는 한 여자의 '첫 번째'이기를 원하고, 여자는 한 남자의 '마지막'이기를 바란다고. 그럼에도 그러한 염원은 늘 배반당하기 마련인 것을. 이제 첫 번째가 아님이 증명되었거니와, 이 여자에게 과연 나는 몇 번째에 해당할까? 이 몸을 스쳐간 뭇 사내들처럼, 머지않아 나라는 존재도 이 암컷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왜냐하면 나 역시 이 여자에게 마지막 남자가 되지는 않을 테고, 또 하나의 여성을 만나는 순간 이 여자는 나에게 과거가 될 테니. 그렇다면 피장파장, 장군 멍군이로구나.

그런데 왜 나는 지극히 육체적인 이 일에서, 정신적인 위안까지 얻고자 하는 걸까? 그건 욕심이 아닐까? 아마 태준 형은 이런 나를 비웃을 것이다. 무수히 스쳐가는 사냥감을 일일이 기억하는 일은,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피곤하다고. 불필요한 짓이라고. 그건 사냥꾼의 자질과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의 끝자락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요? 왜 웃어요?"

"아니. 그냥."

"웃지 말고, 빨리 허란 게는. 추와 죽겄구만은..."

"응? 알았어."

역시 형이상학 아래에 형이하학이 있었구나. 우리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살면서도, 아래를 받치고 있는 배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로구나. 애써 씁쓸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백 미터 경주에 나선 주자처럼. 복수라도 하듯, 이를 갈아 부쳤다. 아랫도리에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풍만한 육체로 말미암아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한 중앙에 무게중심을 두어, 숫제 사지(四肢)가 땅에서 동동 들리도록 해 보았다.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 죽어라 죽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그동안 받았던 설움을 토해내듯, 타락해버린 세상에 대해 복수하듯, 뒤죽박죽인 세상을 흔들어 버릴 기세로, 아니 늘 패배만 당하는 스스로를 응징하듯 여자의 몸뚱이를 부여잡고 그렇게 몸부림쳤다. 발악을 해 댔다.

하지만 섹스란 흔히 말하듯, 그렇게 즐거운 일이 못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중에도, 이상하게 슬픔 같은 것이 올라왔다. 그것을 짓누르기라도 하듯, 남자는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일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끝까지 추격하여 확인사살을 해야만 한다. 오늘밤 나에게 주어진 지상과제(至上課題)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는 데에 있다. 이 순간. 나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사랑'이니 '진실'이니 하는 말들은 말장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그것은 욕정을 채우기 위한 위선이고, 가식일 뿐이다.

달구어진 육신을 순식간에 식혀버리는 바람 탓이었는지,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친구 녀석들 생각 때문이었는지, 격렬한 피스톤 운동은 불과 몇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남자의 몸뚱이 아래에 여자의 육체가 축 늘어져 있었다. 둘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욕설까지 퍼부으며 거칠게 굴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푹신한 여체 위에 엎드러져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개무량할 일인가? 너무나 행복했다. 꿈만 같았다.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만 있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달콤한 시간이 흘러갔다. 목을 감았던 팔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멀리 외딴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자식들, 잘 놀고 있겠지. 순진하게 시리. 순식간에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실속 없이' 에너지만 낭비하고 있을 아이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상대적 우월감이랄까, 어떤 승리감 같은 것이 일시에 밀려왔다.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이제 나도 어엿한 사냥꾼이 되었구나.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토록 많은 번민과 갈등,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들을 보냈구나. 이 찬란한 시간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도 먼 길을 돌아왔구나.'

오랜만에 포식(飽食)한 맹수가 먹이의 잔해(殘骸)를 살펴보듯, 남자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칼, 달빛에 빛나는 하얀 허벅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갈구하듯 여전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여체에 사냥꾼의 눈길이 머무는 순간, 다시 한 번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만지려는 찰나, 여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 던져진 팬티와 스타킹을 주워 꿰며,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뒤로 넘겼다. 핀을 입에 문 채 머리채를 묶던 여자가, 새삼스레 이쪽을 바라본다.

"오빠. 먼저 들어가. 나 부엌으로 해서, 쪼금 있다 들어 가께."

표정은 온화해지고, 목소리 또한 무척이나 다정해져 있었다. ‘관계’ 이전의 다소 긴장된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물론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았다. 지어미를 거느린 지아비의 뿌듯함이 이런 걸까? 적의 진지를 점령한 장군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물론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오늘밤만큼은 특별하고 싶다.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 사이로 머물고 싶다. 어차피 인생은 찰나인 것을. 어차피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인 것을. 몸이 떨리도록 긴장된, 슬프고도 아름다운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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