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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Oct 14. 2016

노무현의 대변인 윤태영,말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 후퇴

                  


"대통령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어린이날을 맞아 청와대로 초청된 어린이들과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는 행사였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한 어린이의 질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위와 같이 대답했다. 짧은 말이지만 자신의 철학과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었다. 내게 그저 '말만 많은 대통령'이었던 그는, 그 뒤로 ‘말 잘하는 대통령'으로 바뀌어갔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말을 가장 많이 하고, 말 때문에 가장 많이 고생한(?) 대통령. <대통령의 말하기>(위즈덤하우스/ 2016년)는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가지고 쓴 책이다. 저자 윤태영 작가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과 제1부속실장을 지낸 '노무현의 입'. 2000년부터 약 10년간 500여 권의 포켓수첩, 100여 권의 업무수첩과 1400여 개의 컴퓨터 파일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설득과 소통의 법칙"을 <대통령의 말하기>에 담았다.


9월 28일 서울 신수동 노무현재단 사무실에서 윤태영 작가를 만났다. <대통령의 말하기>는 ‘자기계발서’로 분류된다. 저자는 서문에 "말하기의 세계에서 앞서나가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책의 의미를 써뒀다. 노무현과 자기계발? 괜한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왠지 그 이유만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역시 윤태영 작가는 이 책에 "이중의 목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계발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출판사의 제안을 듣고 ‘대중적으로 이 책을 더 읽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담긴 생각이나 철학이 이 자기계발서 안에도 반영되도록 배치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생각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그의 말하기 기법 또한 소개해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중의 목표다.

실제로 책은 '기록'과 '실용'의 이중의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 말하기 '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잘 정리돼 있지만, 사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기 '태도'가 더 눈에 띄었다. 기술은 표면의 문제, 태도는 본질의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이 반지르르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이유는 결국 콘텐츠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야기하는 방식, 태도, 그가 살아온 과거들이 다 포함돼서 하나의 말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사람을 설득하고 소통하는 기반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신 있게 이야기하려면 일단 살아온 과거가 당당해야죠. 잘 살아온 사람만이 상대방의 질문에 ‘예, 아니오’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윤태영 작가는 말하기의 태도와 함께 '생각의 힘'을 강조했다. 책에서는 마지막 챕터인 5부에서 '끊임없는 사색의 결과로서 자신의 철학에서 나온 말'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책의 첫머리에 있는 저자 서문의 제목도 "생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다.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상깊게 남아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같은 말들도 그냥 말재주를 갈고 닦아서 나온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10년간 기록한 노무현의 말... 그 속에서 찾은 소통의 법칙

"치열함 같아요. 치열함. 그런 치열함이 없으면 그냥 두루뭉술한 단어들을 썼을 것 같은데, 이 얘기를 어떻게 국민들한테 설명할 건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생각하고 내놓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런(뜻밖의) 표현들이 나오죠.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밋밋한 연설문, 주제가 없는 연설문은 전부 반려됐어요. 정확한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쓰셨던 것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이, 보좌진이 써준 연설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외국 방문 중 경제인 대상 연설 같은 것을 할 때는 쓰여진 원고를 덮고, 자신의 생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70~80%는 된 것 같다고 윤태영 작가는 이야기했다. ‘관례에 따라’ 하나마나한 말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으로 만든 ‘알맹이’를 확실히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들의 연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역사 속 위대한 누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는 식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 속 이야기를 많이 활용했다. 때로는 자신을 한껏 낮추고, 실패의 경험까지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듣는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더욱 편안히 다가오게 했다. 윤태영 작가는, 자신의 말과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일관된 태도이자 소신이었다고 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에 대한 말'도 참 많이 남겼다. 책에 인용된 말들 가운데 윤태영 작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은 무엇일까. "독재자는 힘으로 통치하고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정치를 합니다. 제왕은 말이 필요없습니다."(110~111쪽) 노무현 대통령이 왜 '말 많은 대통령'이 됐는지를 스스로 설명하며 한 말이다. 나 역시 윤태영 작가에게 그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 대목에 밑줄을 그어뒀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기 말만 반복하는 대통령, 국민은커녕 언론과도 대화하지 않는 대통령을 연이어 겪었기 때문일까?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듣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민주주의의 과정인 것 같아요. (말을 많이 하는 대통령과 그렇지 않은 대통령이 있는 까닭은) 말재주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어요. 문제는 소통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민주주의는 말로 시작하거든요. 국회라는 곳은 하루 종일 말하는 곳 아닙니까? 민주주의는 곧 대화와 토론인데, 그게 없어진다는 건 민주주의가 뒤로 가고 있다는 것 같아요. 상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노력, 이게 말재주보다 지도자의 일차적 덕목이 아닐까 해요.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회에 참석한 사진들이 굉장히 많아요. 참모들은 오히려 말렸죠.(웃음) 왜냐면 대통령이 논쟁의 당사자가 되면 지지율이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도 직접 나가시고. 기자회견에서도 일문일답은 하지 말자고 (참모들이) 말하면, 오히려 ‘일문일답을 하러 나가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냐’ 하셨어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은 직접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윤태영 작가는 저자 서문에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참여정부 5년은 '말의 전성기'이기도 했다"라고 썼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이제 궁금증이 풀렸다. 윤태영 작가는 다시 한번 "힘이 아니라 말로 정치를 한 시대"라는 뜻이라고 정리해줬다.

"민주주의는 말로 시작... 자기 생각 설명하는 노력이 지도자 덕목"

하지만 윤태영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로 하는 정치'가 지지율 면에서는 분명 불리하게 작용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말을 아끼고 이미지를 앞세우는 정치가 지지율을 높이는 데는 더 좋았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국민들과 직접 소통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는 지금 다시 생각한다 해도 유의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정치인 노무현'이 가져온 생각,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모들의 만류에도' 국민들에게 직접 사과한 적도 있다. 2005년 12월, 시위 도중 두 명의 농민이 사망한 것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이다. 윤태영 작가를 만난 날은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 진압에 쓰러져 숨진 날(9월 25일)로부터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이었다면 다시 한번 참모들의 뜻을 어기고 마이크 앞에 섰을까? 윤태영 작가는 "당연히 바로 사과하셨을 것"이라고 짧고 강하게 말했다.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말 잘하는 사람'의 대표 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은 ‘연설’에 가깝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대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윤태영 작가는 두 대통령이 겪은 시대가 다르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공감했다. "웅변의 시대"가 지나고 "소통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권위주의 시절 재야 정치인으로 살던 때에는 ‘웅변’의 말을 많이 했지만, 민주주의 시대가 온 뒤에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통'의 말을 많이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책에 실린 노무현 대통령의 말들을 읽으며, 그 특유의 말투가 생각났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말들을 더 이상은 육성으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윤태영 작가는 어땠을까? 그가 남긴 수많은 말들을 정리하고 발췌해 이 책을 쓰면서, 그의 ‘부재’를 더 절절히 느끼지는 않았을까?

"2014년 <기록>, 2015년 <바보, 산을 옮기다> 그리고 이 책까지 모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들이에요. 저는 그동안 늘 대통령의 말씀에 묻혀 산 셈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하면 거꾸로, 부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한편으로는 물론 어렵고 힘든 과정이 많이 있었어요. 사실 이전에 쓴 책들 속에는 그런 점들이 알게 모르게 반영이 돼왔는데, 이번 책은 자기계발서 형태로 쓰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극복한 것 같아요. 이 책은 톤이 밝아요. 그러면서 저도 좀 밝아진 것 같고, 이제 더 이상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됐다고 할까요?"

윤태영 작가는 자기계발서라는 이 책의 정체성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쓸데없이' 감상을 들쑤시려 하지 않았다. 저자가 자신의 정서를 드러낸 글은 각 챕터의 마지막에 짧은 '삽화'처럼 들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읽는 것 자체로 아직도 슬프거나 그립거나 원망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묻혀 사느라 오히려 부재감을 덜 느끼는 상황이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고 말했더니, 윤태영 작가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사실 제가 노무현 대통령 꿈을 많이 꿔요. 일상이 또 그러니까(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말로 책을 썼으니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책을 내고 나면, 이런 인터뷰를 하고 나면 더 그러니까요. 책과 관련해서 강연을 하러 가면 또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해야 하고…"

"기록자의 운명은 엄청난 자산인 동시에 커다란 부채"

'더 이상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됐다'는 말과 '아직도 노무현 대통령 꿈을 많이 꾼다'는 말. 얼핏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감정의 사이를 윤태영 작가는 아직도 오고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묘한 혼란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 그가 <대통령의 말하기>에서 강조한 '진실의 말하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윤태영 작가가 본격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것은 2001년 노무현 대통령이 16대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지금까지 강산이 한 번 하고도 절반쯤 변한 시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제 인생의 황금기죠.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제가 있겠습니까? 2001년 후보 캠프에 합류할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본 정치인 중에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이분 대선을 도와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치 일을 정리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시면서, 그 후의 제 인생은 그것으로 결정된 것 같아요. 말하자면 엄청난 숙제들이 생긴 거죠. 당신(노무현 대통령)을 기록해야 할 사람으로 지목하신 거니까. 운명 같은 게 돼버렸죠. 저한테 엄청난 자산을 남겨주신 동시에 커다란 부채도 남겨주신 거예요."

윤태영 작가는 청와대 대변인 시절 '나한테 왜 대변인을 시켰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말을 화려하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생각 끝에 다다른 결론은 '당신을 말씀을 잘 전달하라는 뜻'이라는 것. 메신저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생각,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정치를 하지 말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자는 생각이 하나의 '원칙'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에 윤태영 작가에 '정치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그는 18대 총선을 몇 달 앞두고 있던 2007년의 어느 날로 기억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불러서, 정치인으로 나서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윤태영 작가는 스스로 운명이라 받아들인 역할에 지금도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임기는 진작에 끝났고, 그가 대변해야 할 대통령은 지금 이 땅에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노무현의 대변인'으로 살고 있다.


자산이자 부채, 극복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 윤태영 작가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역설 속에 지금도 강렬하게 서 있다. 이미 세 권의 책을 써낸 지금도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담긴 수첩을 정리하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의 숙제는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 10주기(2019년) 때까지 평전을 내는 게 제일 큰 고비를 넘는 일인 것 같아요. 원래는 평전을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수족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평전을 쓴다는 건 안 맞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직도 설명해줘야 할 오해들이 있고, 아직 열어보지 못한 (기록)파일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할 수 있는 게 평전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료의 형태로 갖춰놓는 것이고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취재 : 최규화 (북D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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