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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Oct 21. 2016

이주은, 그림으로 여성을 읽다

각진 얼굴 vs 달걀형 얼굴

               


최근의 가장 뜨거운 감자 하나를 고르자면 바로 '페미니즘'이 아닐까 싶다. 여성혐오와 함께 불거진 페미니즘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는다. 차별과 혐오, 폭력으로 둘러싸인 여성들의 삶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고민해야 할 화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를 그저 비난과 분노의 방식으로만 대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에 그칠 터. 인류 역사상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통해 우리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이주은 교수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를 관통하는 여성의 삶,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호젓하게 걷기 좋은 날씨였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호수를 따라 캠퍼스를 거닐었다. 이마 위로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느릿느릿 걸은 끝에 도달한 건물 하나. 이주은 교수의 연구실은 예사롭지 않았다. 벽 한쪽에 늘어선 서재에는 책들이 갓 세수라도 하고 나온 듯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책상과 소파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간 봐온 여느 교수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집 서재는 엉망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미소가 창문으로 들이치는 가을볕만큼이나 해사하게 느껴지던 오후였다.

이주은 교수가 새롭게 펴낸 저서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이봄/ 2016년)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녀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빅토리아 시대는 공교롭게도 대부분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또한 그림 속 여성들은 대체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주은 교수는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들이 어떠한 철학과 미학을 바탕으로 여성들을 화폭에 담았는지 책을 통해 차분하게 소개해나간다. 

"인간을 결혼과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때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였어요. 남성에게는 가장의 역할을, 여성에게는 어머니의 역할을, 아이들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기를 강요했죠. 특히 여성을 결혼과 성이라는 기준으로 억압했던 때이기도 했고요.

여성은 시민의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았고, 아버지 밑에 있지 않으면 남편에게 속해 있어야 하는데 남편에게 버림받으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죠. 재산을 상속받거나 소유할 수조차 없었고 양육권조차 가질 수 없었으니까요. 오늘날 여성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고질적인 편견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여성에 대한 고질적 편견 논하려면 빅토리아 시대를 봐야 한다"

나이가 찼는데도 청혼받지 못하면 ‘문제 있는’ 여자로 불렸고, 결혼은 안 하고 오랜 연애 상태에 있으면 ‘알 수 없는’ 여자로 간주하였지요. 그 밖에도 남편을 먼저 죽게 한 ‘기 센’ 과부, 호색기가 있는 ‘밝힘증’ 여자, 남자 대신 생활비를 버는 ‘가엾은’ 여자, 직업적 야망이 커서 ‘가정에 위협적인’ 여자, 책을 과하게 읽어 따지기 좋아하는 ‘피곤한’ 여자, 피임을 하며 몸의 자유를 즐기는 ‘이기적인’ 여자, 자전거를 타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남자 같은’ 여자 등, 입담에 오르내리는 여자들의 종류를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7쪽


최근 개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때문이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인 <핑거 스미스>의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상당한 호기심이 들던 때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근·현대사상 가장 화려하고 역동적인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를 넓혀가며 제국주의의 위용을 과시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왜곡된 성 윤리를 강요했고, 성적 문란이 팽배했다. 보기에 따라 뜨거운 논쟁이 있는 시대임이 분명했다. 

보통 미술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프랑스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화가도 프랑스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나. 반면 영국의 화가를 말하라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주은 교수 역시 일반인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부터 당시의 영국사회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의 화가들은 한순간의 찰나, 즉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이야기를 희생시킨 반면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들은 문학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그림을 구성했다고.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삶에 뿌리 깊이 퍼져 있는 성 역할의 기준이 대부분 그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된 성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당시의 화가들은 고정된 성 역할을 그림으로 유형화했어요. 그림 속에서 타락한 여성은 각진 얼굴에 화려한 옷을 입고 빗으로 긴 머리를 빗고 있는 반면, 정숙한 여성은 달걀형 얼굴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죠. 화가들이 편집한 여성을 그림 속에 담은 거예요. 그래서 방대한 책을 통해 한 줄 한 줄 읽는 것보다 그림을 통해 더 빨리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죠.

빅토리아 시대에는 가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다 보니 여성을 보는 잣대가 상당히 이중적이었어요. 집에 있는 여성, 즉 아내와 딸은 무조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거리에 있는 매춘부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 여겼죠. 어떻게 보면 우리도 이 부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고요. 그렇다고 제가 가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가정이라는 것이 인간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면 굉장히 폭력적인 사회가 될 수 있어요. 여성 혐오로도 이어질 수 있고요." 

"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다움으로 평가해야"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되던 때였다. 피아노 다리조차 정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덮개로 가려야 했고, 여성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써서 출간하는 것이 일대 사건이 될 정도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서 '여성의 의무는 남성을 돕는 것이다'라는 공개적인 발언했을 정도였으니 더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주은 교수는 책의 표지로 존 워터하우스의 ‘랜슬롯 경을 바라보는 샬럿의 공주’라는 작품을 선택한 이유로 덫에 걸려 있는 듯한 여성의 모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샬럿 공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샬럿 공주는 평생 직물만을 짜며 바깥세상을 보는 순간 벌을 받아야 했던 인물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생전 처음으로 얘기하는데 저 페미니스트에요. 페미니스트라 하면 사람들이 굉장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이 자리를 빌려서 그 오해를 좀 풀고 싶어요. 요즘 페미니스트의 의미가 피해망상에 걸려 있고, 따지기 좋아하는, 극렬 행동주의자로 왜곡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일단 '남자 사람 친구' 많고요.(웃음) 제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사람도 대부분 남자였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은 적은 거의 없어요. 오히려 예술사의 특성상 여성이라는 점으로 이익을 많이 봤죠. 

여성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다면 누구든 페미니스트라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남녀 우월에 관한 얘기가 아니니까요. 100년 전에 만들어진 기준으로 일정한 틀 속에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왜 지금까지의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미술가가 없었나’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어요. 이 질문이 여성 중에는 훌륭한 사람이 없었다는 식으로 답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항상 그때 놓인 상황과 맥락을 함께 놓고 인간다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차원의 생각을 공유한다면 누구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죠."

이주은 교수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에서 열등감의 기호로 인식된다면 이는 분명 바꿔야 할 문제라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은 정신적 코르셋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한국은 성 격차 지수 순위에서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한국 여성들의 지위는 여전히 낮기만 하다.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무언가를 규정하려는 시도 역시 팽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부디 그녀의 책이 성별을 불문하고, 여성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작은 발판이 되길 바란다.


사진 : 신동석

취재 : 윤효정(북DB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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