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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Oct 21. 2016

땅콩집 이야기

첫사랑

 

어느새 고3. 

청춘은 고통의 무게로 다가왔고, 젊음은 둥지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입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온몸에 통증이 전달되어 왔다. 벌써 재작년이던가. 7?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유신체제가 선포되더니,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운 좋게 풀려났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에 마음 쓸 계제가 아니었다.

 지난 가을에 옮겨온 하숙집은 광주상고의 북쪽으로 볼록하게 솟아있는 풍향동의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앞이 공터인 대문채에는 방 하나와 헛간, 재래식 변소가 딸려 있었고, 제법 널따란 정원에는 갖가지 수목들이 가득했다.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열매가 보는 이의 입에 침을 괴게 하고, 예닐곱 살짜리 아이의 주먹크기만 한 감이 옛 이야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대문에서부터 시멘트 길로 이어진 본채는 지붕이 나지막한 한식 기와집. 건물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대청은 그 아래를 파내어 지하실을 만들고, 다시 그 위를 덮어 가용(可用) 공간을 두 배로 늘려놓은 곳. 작달막한 키와 야윈 몸을 가진 주인아저씨는, 도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세련미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마디가 굵은 손가락, 어눌한 말씨, 해맑은 웃음은 차라리 순박한 농부 쪽에 가까웠다. 그는 마당과 탱자나무들로 구분되어 있는 동편의 널따란 포도밭에 나가 온종일 땀을 흘렸다. 

서편에 딸린 부엌의 기둥 모서리를 삥 돌아가노라면, 북쪽으로 방이 하나 옹색스럽게 붙어 있었다. 지하방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하숙생을 하나라도 더 받고자 하는 주인아줌마의 탐욕이 빚어낸 코믹한 소품.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있는 듯한 그 공간에 몇 달을 기거하는 동안, 태민에게도 드디어 삶의 의욕이 찾아들었다.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정면으로 맞서보자. 다시 한 번 나의 운명에 도전장을 띄우자. 도전의 계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뛰어보자.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마라톤이라 했거늘.'

 돌아보면 상처투성이, 패배의 자국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새로운 각오 덕분인지, 1학기 중에는 제법 성적이 올라가는 듯했다. 그러나 날씨가 더워질 때쯤 몸도, 마음도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핑계 거리를 찾는 데에 같은 처지일 수밖에 없는 고3 하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하실 방을 즐겨 찾기 시작했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입시 이야기는 첫 번째 금기사항. 그저 라디오 음악을 감상하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혹은 늦잠이나 낮잠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행하기에,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그 땅 밑의 별세계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7월 초순의 어느 일요일 아침. 밤늦도록 웃고 떠들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던가 보다. 워낙에 배가 고파 눈을 떴다. 계단을 더듬어 올라오자,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이 시간에 밥을 줄라나?'

 다짜고짜 상을 차려달랄 만큼 숫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치도 살필 겸 세수부터 하기로 맘먹었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마루 끝에 서서 양치질을 하는 동안, 밝은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다. 수돗가로 가려 섬돌에 발을 내리 딛는 순간, 자석에 끌리듯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손바닥만 한 밭 하나를 넣어두고, 서로 살을 맞대고 있는 서쪽의 이웃집. 그 집 대문채 장독대 위에 어떤 여학생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웃이나 마찬가지인 그 집에 대해, 그동안 태민은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바로 이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고 말았으니. 빨래를 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태양은 백설같이 희게 만들었다. 까만 머리칼을 질끈 동여맨 장밋빛 스카프는 애교의 상징처럼 보였고,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하얀 종아리는 열아홉 살 머슴애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벼 팠다.

 칫솔을 입에 문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세수하려던 것조차 까맣게 잊었다. 오직 시선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모아졌다. 바지런히 손을 놀려 대야에 담아온 옷가지를 건조대에 걸쳐놓은 다음, 그녀는 내려갈 채비를 차렸다. 나풀거리지 않도록 치마 가장자리를 움켜 쥔 손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는 자태는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정신은 몽롱한데, 입안이 얼얼해졌다. 일단 수돗가로 달려가 입안을 대충 헹구고 나서, 또다시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뭘 기대하는 지도, 뭘 궁리하는 지도 모른 채. 한참 후에야 자신이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내가 허깨비를 본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이 집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잖아?'

 이튿날. 태민은 동양극장과 서방시장을 지나, 하숙집을 향한 언덕배기를 오르고 있었다. 서쪽하늘에서 내리꽂히는 햇살로 말미암아 오후 수업까지 마친 육신은 축 늘어질 만도 했다. 물론 학생모 아래의 이마와 교복 아래를 받치고 있는 등짝에서는 쉼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책가방을 쥔 왼손과 땅을 내딛는 두 발에는 힘이 넘쳤다. 집 앞 공터에 이르렀을 무렵.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기적처럼 눈에 들어왔다. 날씬한 다리와 날렵한 몸놀림, 그리고 무엇보다 장밋빛 스카프가 보면 볼수록 매력 만점. 아! 난 바로 이 장면을 꿈꾸고 있었구나! 


해 질 무렵. 태민은 이웃집 대문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맞은편 전봇대 옆에 서 있었다. 이윽고 머리 위의 전등이 주황색 광채를 내뿜기 시작한다. 아! 드디어 여름밤의 화려한 축제가 시작되는구나.

 '하지만 나에겐 시간이 없다. 서쪽하늘에 긴 꽁무니를 드리우며 자신의 몸뚱이를 서둘러 숨기는 저 태양처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오늘은 기어이 결판을 내야 한다. 다가오는 입시 때문에라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이렇듯, 조급해 하는 까닭은 뭘까? 꼭 해야 할 과제도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은 일도 아닌데. 혹시 이걸 사랑이라고 하나?'

 '사랑'이란 단어 앞에 서면, 늘 어색했다. 이씨 부부처럼, 남편과 아내는 으레 그렇게 사는 것이라 여겼다. 자식들 키우고, 살림살이 걱정하고, 이웃들 체면 돌아보고. 굳이 하나를 더 들라면, 오직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라고나 할까. 경진이 형과 이지수의 성폭행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사람 보미로와 진길중의 염치없는 섹스장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맑고 투명한 맘으로 기다리던 이은경,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다. 육체가 배제된, 정신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 앞뒤 가리지 못하는 인간들을 경멸했었다. 문학과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러한 장면을 연출할 때, 꾸며낸 이야기려니 여겼다. 세상에 태어나 할 일도 많은데, 참 한가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편,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쪽'이라 진단해놓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건 앞으로는 그러한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맘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심영진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에 무슨 뚱딴지같은 짓이냐며 역정을 내시겠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다 잊어진다고. 그에 비해 대학 입시는 네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앞으로 네 삶이 여기에 달렸다고. 그래. 그 분들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 또 먼 훗날, 지금의 내 또래 아이를 만났을 때,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충고할지도 모르지. 너만 한 때에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그것이 남는 장사라고. 하지만 젊음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청춘은 결코 학습될 수 없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가고 있는 느낌.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닫는 리어카처럼,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상념에 잠겨 하늘을 쳐다보다가 인기척에 놀라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미리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그녀가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분명 그것은 기적이었다. 쪽대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가게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왜 저러지? 무얼 사러 가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지?'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이런 일이 결코 많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모처럼 찾아온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인데, 놓치면 안 되지. 그렇다면 이대로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하나?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쪽이 낫겠지?'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녀가 무언가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어어 하는 사이, 대문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아예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닭 쫓던 개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야? 머릿속이 텅 비어오며 억장이 무너졌다. 왜 나는 늘 이 모양일까? 왜 나는 과감하지 못할까? 입시 때마다 그것 때문에 실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번 다시 그런 행운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항상 찬스에 약했던 못난이가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도 그 징크스를 깨지 못하다니. 나는 원래 안 되는 놈인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칠산의 세찬 바람을 마시며 자라난 내가, 무라리의 짠물을 들이키며 성장한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집 안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거주춤하는 사이,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또다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혹시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챘을까? 그럴 리 없는데? 그거야 어떠하든, 분명 운명의 여신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구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녀는 느긋한 걸음걸이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순간,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다. 황급히 뒤를 따라 가게 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나 스스로와의 싸움이다! 이 싸움의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신이 허락한 이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서쪽 하늘은 까만색으로 변해 있었고,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은 한껏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녀가 가게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쩌어기...요..."

 "..........?"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무심한 눈동자, 그 앞에서 열아홉 살의 청춘은 다음 말을 잊고 말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두어 걸음을 옮겨놓는 순간, 머리의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손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물렁물렁한 감촉이 손으로 전달되어 왔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의식조차 못한 채, 오직 놓치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힘껏 부여잡았다. 

"아이, 왜 그러세요?"

 "...나 하고 말 좀 하게요."

 "우선 이 손부터 놓으셔요."

 "예?"

 "여기... 좀 놓으시라니까요!"

 아뿔싸! 거머쥐고 있는 그 부분은 다름 아닌 가슴이었다. 세상에! 내가 무슨 치한(癡漢)도 아니고, 성추행할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었는데. 첫 대면부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녀는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왜 웃으세요?"

 "호호호. 우습잖아요?"

 "쩌기... 진작부터 한 번 말을 해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있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해서요." 

남쪽, 광주상고 쪽으로 난 내리막길을 앞장서 걸었다. 말없이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 이쯤 되면 실수도 실수 나름이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떻든 만나게 되었으니. 내리막길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었다. 이층집 담 아래.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열심히 궁리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엷은 구름 뒤로 달이 숨어들었고, 그때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흥건한 흙냄새가 코를 적셨다. 그래. 흙은 늘 고향과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지. 난 본래 여리고 내성적인 데다 여성적이기까지 했는데, 이 도시가 나를 거칠게 만들었어. 거듭되는 패배가 나를 삐딱한 사람으로, 남모를 고통이 나를 공격적인 인간으로 만들었어. 이 도시의 콘크리트가 나를 갑각류(甲殼類) 동물로 바꾸어놓았다고. 하지만 오늘밤은 두꺼운 나의 껍질을 벗어던진 채, 연하고 부드러운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황량한 도시에서 버텨오는 동안 잃어버렸던, 순수한 감정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음에야.

 그녀는 쪼그린 채, 치마를 앞으로 모았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앙증맞은 '여성스러움' 앞에서, 마구 가슴이 뛰었다. 거칠고 우악스런 사내아이들을 순둥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저 여성스러움 아니던가. 주변의 돌들을 모아 깔고 앉은 다음, 그녀 쪽에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앉아 봐."

 ".........."

 대답대신, 도리질. 

"훨씬 편한데...?"

 "..........치마에 흙이 묻으면 안돼요."

 "그까짓 것, 좀 묻으면 어때서..."

 "..."

 어느새 반말로 돌아와 있는 자신의 말투가 일보 전진한 것이라 평가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저기요. 나하고 딱 한 달만 연애해요."

 "예?"

 "한 달만 연애하자고요."

 단순무식, 용감무쌍한 발언에 정작 놀란 것은 태민 자신이었다. 일생에 한번 얻을까 말까한 이 좋은 찬스에 왜 '사랑'이라는 고상한 어휘 대신, '연애'라는 천박한(?) 단어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까? 이럴 때 놀란 척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 그녀가 돌아보았다. 애써 모른 체했다. 아니, 속으로는 한껏 떨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한 달이예요?"

 "그 후로는 공부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 법이 어딨어요?"

 "지금 여기 있지요. 내일부터 마침 오전 수업만 한다고 해서, 이 기간에만 그쪽을 만날까 하고요. 오늘이 7월 7일이니까, 8월 7일 까지만요."

 "그렇게 자신이 있어요?"

 "나는 한다면, 합니다."

 심약함을 떨쳐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말하는 것. 한껏 높인 목청은 상대방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힘이 된다. 그런데 이처럼 '기간을 정할만큼' 용감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김씨의 '교육'도 한 몫 거들었다.

 "여자란 요물이여야. 사내자식이 계집한테 홀랑 빠져갖고, 지 헐 일 제대로 못허는 놈은 꼬치를 띠어 버러야 혀."

 늘 장남 앞에서 점잖은 언어를 구사하는 김씨였지만, 이상스럽게 여자 말을 할 때에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기에는 사각모를 써 본 무라리 출신 가운데 '부모보다 여자의 말을 더욱 경청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졸라 미리 유산을 타낸 다음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또 어떤 사람은 여자의 꾐(?)에 빠져 미국에 건너간 뒤 소식조차 없다고 했다. 어떻든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김씨이거늘, 만일 내가 여학생에게 정신을 팔다가 대학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떻게 될까? 그 끔찍한 결과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기간을 정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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