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독서가의 세상읽기
지리산 피아골에서 이토록 나라 걱정을 하다니. 예상 못한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보다 뉴스를 먼저 보고, 잠들기 직전에도 챙겨 본다. 뉴스를 보다보면 내 얼굴은 붉게 타는 가을 산보다 더 붉어진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하다.
나라가 엉망이어도, 대통령이 누군지 헷갈려도,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해야만 한다. 가슴이 허탈해도 농민은 나락을 거둬야 하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도 직장인은 순대 같은 답답한 전철에 몸을 실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니까.
서울에 살던 시절, 인격은 물론 품격까지 좋은 한 대학교수가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한국도 미국처럼 자유롭게 총을 살 수 있는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그냥 상상만 해보는 거죠."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인자한 대학교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시민이 자유롭게 총을 소지하는 사회라면, 정치인들이 저런 식으로 정치를 할까요? 악덕 기억가는 노동자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고를 할까요? 검사, 판사, 경찰들이 지금처럼 일을 할까요? 아마 분노한 시민이 총을 들고 자기를 찾아올까봐 지금처럼 비양심적으로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전두환 같은 사람은 벌써 시민이 알아서 ‘처형’을 했겠죠."
물론 그 교수는 총기 소지를 찬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가정으로 상상했을 뿐이다. 식사 이후 그 교수를 사석에서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자주 생각한다.
'정말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하는 나라라면 어땠을까?'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마크 에임스/ 후마니타스/ 2016년)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개인이 일터에서 사적으로 학살을 감행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1989년 9월 14일 오전 8시 30분, 조셉 웨스베커는 총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자신이 다녔던 직장 스탠더드 그라비어에 도착한다. 그 후 웨스베커는 30분 동안 총을 난사해 직장 동료 7명을 죽이고 20명에게 부상을 입힌다. 웨스베커는 현장에서 자살했다. 사실 웨스베커의 표적은 자신의 상사였던 '감독'이었다. 운 좋게(?) 감독은 자리에 없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미국의 독립 저널리스트 마크 에임스는 웨스케버가 왜 직장에서 총기를 난사했는지 취재를 시작한다. 한국이었다면 ‘사이코패스의 광란’ 혹은 ‘정신질환자가 부른 참극’ 정도로 간단히 정리했을 일. 미국 사회는, 좋은 저널리스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웨스베커는 자신을 학대하고, 해치고, 모욕하다가, 더는 쥐어짤 게 없자 내던져 버린 회사 전체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폭력적인 미친놈이 격분해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별종이 느닷없이 폭발한-것이라는 일반적는 견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묘사는 ‘어느 미친놈이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이다. 이런 묘사는 틀렸다. 또 이런 분노 살인이 단순히 표적을 정해 복수를 실행한 사건인 것만은 아니다. 이런 사건들의 세부 내용과 정황들은 사무실, 작업장, 우체국, 심지어는 최근 이런 범죄의 무대가 된 학교에서 발생한 분노 살인과도 놀랍도록 흡사하다.
저자 마크 에임스는 다수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총기난사 사고를 분석해본다. 그의 말대로 "놀랍도록 흡사"한 점이 발견된다. 바로 가해자의 직장이나 학교에는 무시, 왕따, 착취, 해고, 혹독한 경쟁 등의 문화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가해자들은 대개 그 문화의 피해자였다. 저자의 말은 우리 사회의 아픈 점을 후벼판다.
분노 살인 사건에서 프로파일링 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이들의 회사와 학교다.
어떤가.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의 일이 벌어지지 않나? 가해자 한 명을 ‘또라이’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거나 그의 가정사나 성장과정에서만 원인을 찾는, 그리하여 가해자 한 명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 게 ‘한국적 현실’이다.
저자는 취재 결과에 따라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웨스베커 이전에 회사에서 직원이 폭발해 동료들을 모조리 쏴죽인 유의미한 전례는 없었다. 그 원인은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1980년대 들어 미국의 기업 문화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는 격무와 스트레스, 경쟁에 내몰려 몸과 마음이 심하게 무너진 사람들이 자살 직전에 총기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총기와 함께 나의 옛 동료들, 친구, 지인들이 생각났다. 저마다 괴로움을 토로하며 사표를 만지작거렸던 사람들. 하지만 먹기살기 위해 차마 사표를 내놓지 못하는 이들.
작년에 친한 지인 한 명은 회사에서 우수사원상을 받았다. 전혀 부럽지 않았다. 지인은 과로 탓에 곧 병원에 입원했다. 한 친구는 우울증을, 한 선배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여러 후배는 회사 상사와의 갈등 탓에 정신과 진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다. 병원 치료를 받는 후배에게 그 회사 선배는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맷집이 좀 약한 것 같아. 많이 예민하기도 하고."
술에 취하면 자주 폭언을 하는 그 선배가 보기 싫어 후배는 오늘도 사표를 만지작거린다. 나는 솔직히, 그 후배가 '회사에서 흉기난동'이라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무사히 사표를 내기 소망한다.
미국에서는 총기난사 사고가 자주 벌어진다. 총기 규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는 인구 10만 명당 10.3명이 총기사고로 사망한다. 1년에 약 3만 명이 총기 탓에 사망한다. 미국은 위험한 사회일까?
글쎄, 총기가 자유로워도 미국이 한국보다는 안전한 사회로 보인다. 작년에 한국에서는 인구 10만 명당 26.5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OECD 국가 중에서 독보적인 1위다. 인구 5000만 명으로 계산하면, 1만3250명이 자살한 셈이다. 인구대비로 계산하면 미국에서 총기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보다 한국의 자살자가 더 많다.
다시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싶다.
스탠더드 그라비어는 문을 닫았다. 오늘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는 여전히 이런 분노 살인의 목표물 중 하나이다. 가해자들은 그들이 총으로 겨냥했던 개개인들 못지않게 회사 전체, 일종의 제도로서의 일터, 기업 문화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이들의 목적은 회사 자체, 고통의 원천을 파괴하는 것이다.
한국은 자살률만 ‘세계 1위’가 아니다. 노동강도, 노동시간, 남녀차별 등도 세계적 수준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참고 살아간다. 참다 지친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자실을 결심한 사람은 살인을 겁내지 않는다. 다시 궁금해진다.
"한국이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하는 나라라면?"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아침 출근길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나의 지인들이 흉기 대신 책을 들길 소망한다.
그나저나 최순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