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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Oct 28. 2016

전구는 화학과 물리학의 결정체

사이언스 하우스

                    

1887년 3월 6일, 어스름이 깔린 경복궁의 건천궁 앞마당에 기대감과 호기심을 잔뜩 안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둠이 건청궁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환호와 함께 눈부시게 환한 빛이 밝혀졌고 그 빛은 어둠이 삼켜버린 사람들과 주변 궁의 풍경을 다시 토해냈다. 전구가 조선 땅에서 처음 사용되던 순간이다. 이날 이후부터 전구는 129년간 한반도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백열전구가 LED에 의해 자리를 잃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인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후 '인류가 발견한 두 번째 불'이 백열전구라면, LED는 '인류가 발견한 세 번째 불'이 아닐까.

어릴 적 방 천장 중앙의 전선 끝에 달려 있는 검은색 소켓과 스위치, 그 끝에 흔들거리던 백열전구는 물건들을 비추며 환상적인 그림자들을 만들었다. 흔들거리는 불빛에 의해 방 안의 물건들이 만든 그림자들을 보면 마치 방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었고, 그것은 신비하고 재미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방 안 구석구석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찾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숨겨진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었다. 이런 추억을 간직한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 

전기에너지의 5%만 가시광선으로 전달하고 나머지는 적외선과 열로 방출되는 백열전구가 저전력, 고효율의 LED와 싸워서 이길 방법은 없다. 추억을 지키기 위해 변화와 발전을 막는 것은 그저 욕심일지 모른다. 

오늘은 집에 있는 모든 백열전구를 LED 전구로 교체를 하는 날이다. LED가 발산하는 주광색 빛은 형광등 같은 차가운 느낌이라 최대한 백열전구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주백색이나 전구색 LED 전구를 마트에서 찾고 있었다. 


"아빠 말대로 이제는 백열전구가 거의 없네요. 대부분 LED 전구예요. 신기해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전에는 양초나 호롱불 같은 것을 사용했었죠? 전구를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1800년대 이전까지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실은 전기를 이용한 전구가 나오기 전까지 약 80년 동안은 가스등이란 걸 사용했단다. 1791년 천연가스가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집집마다 가스를 이용해 불을 밝히는 가스등을 사용하게 되었지. 하지만 초기 가스등 불빛은 가스를 직접 태우는 구조이기 때문에 기존의 양초나 호롱의 밝기와 비슷했어. 조명의 밝기를 휘도(luminance, 輝度)라고 하는데, 휘도가 좋지 못했던 것이지. 불꽃의 열로 더 밝은 빛을 내는 물질을 개발하여 휘도를 높였고 발전된 가스등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어. 우리 집에도 있는데, 너도 봤을걸?

 
"네? 요즘도 쓰는 데다가, 우리 집에도 있고, 제가 봤다고요? 그럴 리가…." 

이런! 캠핑 갔을 때, 밤에 식탁을 비추던 등 기억 안 나니? 

"아! 그게 가스등이에요? 무지 밝아서 전등인 줄 알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밝죠? 그리고 아빠는 왜 전구가 있는데 가스등을 쓰세요?" 

그렇게 밝은 이유는 가스가 아닌 어떤 물질 때문이야. 그 물질은 화학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물질이고 열을 잘 전달하기 때문에 마치 전구의 필라멘트 같은 역할을 해. 맨틀(mantle)이라고 부른단다. 아빠가 가스등을 켜기 전 그물같이 생긴 천을 가스통 점화구 안에 씌우는 것을 봤지? 그게 바로 맨틀이야. 맨틀의 원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토류 금속 산화물을 사용해. 이런 토류 금속 산화물은 1885년 희토류 원소를 연구하던 오스트리아 기술자 카를 아우어 폰 벨스바흐(Carl Auer Freiherr von Welsbach)가 고안한 희토류 산화물이란다.

"희토류는 또 뭐지요? 이거 질문이 꼬리를 무네요."

하하, 당연한 현상이야. 좋은 현상이지. 맨틀과 희토류는 다음에 알려줄게. 아무튼 아빠가 가스등을 사용하는 이유는 가스등에서 나오는 노란색이 감도는 밝은 주황빛이 주는 따뜻함 때문이야. 형광등이나 LED 전구의 하얀색 불빛이 도시적이고 정감 없게 느껴지거든. 캠핑을 가면 디지털기기를 멀리하는 이유와 비슷하지. 다소 불편하지만 디지털시대의 피로감을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회복하는 순간이 때로는 필요하단다. 

아무튼 다시 전구 이야기로 가야겠구나. 당시 에디슨도 맨틀 같은 희토류 금속 발광에 대해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서둘러 전구로 방향을 바꾸었어. 전기를 이용하여 발광하는 발열체인 필라멘트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 발열체의 녹는점이 낮기 때문이었지. 발광을 하려면 전기저항이 커서 발열체가 달궈지며 전기에너지가 열과 빛에너지로 바뀌어야 하는데, 만족할 정도의 밝기를 얻기 전에 필라멘트가 녹아버렸거든. 

그래서 어떤 물질로 필라멘트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지. 에디슨은 여러 가지의 연구 끝에 탄소코일을 발명하여 꽤 괜찮은 전구를 만들었어. 면화로 만든 실이나 실처럼 꼰 종이를 이용해서 탄소 필라멘트를 만들었지.

하지만 이 탄소 필라멘트 전구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었어. 탄소 필라멘트는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숯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일반 공기 중에서 숯에 산소가 결합되어 빛과 열이 발생하며 연소되면 재가 되는 것처럼 필라멘트가 재로 된 거야. 그래서 산소를 차단하면 연소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탄소 필라멘트를 유리관 안에 넣어 내부를 진공으로 만든 것이지. 그런데 그렇게 해도 탄소 필라멘트는 오래 사용할수록 약해져서 작은 충격에도 부서지기 쉬웠어.

"처음 전구에 사용된 필라멘트가 고깃집 숯 같은 것이라고요?" 

응. 당시에는 전기를 완전히 빛에너지로 변환하는 방법이 없었어. 자주 손상되는 필라멘트를 보완하려고 녹는점이 탄소보다 높고 강한 물질을 연구하게 되었지. 오스뮴(Os), 탄탈(Ta), 텅스텐(W) 세 가지 물질이 후보로 올랐단다. 상당히 비싸고 단단해서 가공하기 어려운 오스뮴(Os)에 비해 탄탈(Ta)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대량으로 공급하기 용이했어. 텅스텐 필라멘트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아마 한동안 탄탈 필라멘트 전구를 사용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스 신화 속 인간이 신에게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인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후로 '인류가 발견한 두 번째 불'이 바로 백열전구란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텅스텐 백열전구는 에디슨 이후 30년이 지난 1910년, 윌리엄 쿨리지(William Coolidge)라는 사람이 필라멘트의 수명을 연장시켜 만들었어. 텅스텐 백열전구는 텅스텐으로 만든 필라멘트가 공기를 뺀 유리전구 속에서 전류에 의해 고온으로 달궈지면서 나오는 백열광을 이용한 것이지. 텅스텐(W)은 원자번호 74번인 금속이야. 

지난번에 텅스텐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 별명이 탐욕스러운 늑대라고 했는데, 오늘은 그 이유를 알려줄게. 텅스텐 원소는 칼슘이 들어 있는 회중석(Scheelite)(CaWO4)이라는 원석에서 추출하는데, 이 사실을 처음 밝힌 화학자 칼 빌헬름 셸레(Karl Wilhelm Scheele)의 이름을 따서 광석에 이름을 붙였어. 회중석은 정말 무겁단다. 작은 여행가방 정도 크기의 돌 무게가 수백 kg에 달할 정도지. 그래서 광부들이 이 광석을 '퉁스텐(Tung Sten)', 스웨덴어로 '무거운 돌'이라 불렀어. 그래서 텅스텐이 되었단다.

그런데 원소기호는 원소 이름과 관련 없이 'W'를 사용한다고 했지? 이 광석이 주석과 섞이면 주석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오래된 주석광산 주변에서 텅스텐 광석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지. 이런 묘한 현상 때문에 이 텅스텐 광석을 탐욕스러운 늑대(Wolf)라고 부르며 텅스텐에 'Wolfram'이라는 별명을 붙였어. 굶주리고 탐욕스러운 늑대가 주석을 훔쳐 간다고 비유한 낭만적인 이름이지. 그래서 'T'가 아니라 이 Wolfram에서 따온 'W'를 원소기호로 사용하게 된 거야. 과학자들도 가끔 낭만적인 데가 있지 않아? 

텅스텐은 무겁고 단단하고 금속 중 녹는점이 가장 높은 금속이야. 녹는점이 무려 3,422°C(3,660K)라서 3,000°C까지 가열할 수 있어. 하지만 텅스텐 필라멘트가 순탄하게 개발된 건 아니야. 고온에서 잘 견디지만 숯처럼 기화하면서 유리관을 검게 만들었지. 그래서 질소, 아르곤, 크립톤과 같은 불활성 기체를 진공 유리관 안에 넣어 압력을 증가시켜 기화를 억제시켰어. 이렇게 만든 전구를 지금까지 사용한 거야.

 
가끔 백열전구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 번쩍거리며 필라멘트가 끊어지곤 해. 아빠가 어렸을 적엔 전구가 자주 망가져서 전구 심부름을 자주 했었지. 이유는 텅스텐의 저항은 차가울 때 더 작아. 낮은 온도를 좋아하는 금속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식은 필라멘트는 저항이 작아서 전류가 더 잘 흐르는데 갑자기 스위치를 켜면 식었던 텅스텐에 순간적으로 전류가 많이 흐르는 경우가 생겨. 당시는 가정 전압도 안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과전류가 흘러 필라멘트코일이 파손되곤 했던 거야. 

"그런데 백열전구 중에 어떤 건 투명하고, 어떤 건 뿌옇게 되어 내부가 보이지 않던데 왜 그런 건가요? 뿌연 연기가 아르곤 기체인가요?" 

꽤 유심히 봤구나? 아르곤 기체는 눈에 보이지 않아. 아르곤 기체는 18족 원소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18족 원소들은 모든 원자의 로망이라고 했지? 다른 물질과 좀처럼 반응을 하지 않잖아. 반응 때문이 아니라 압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아르곤 가스를 넣은 거야. 전구 유리를 뿌옇게 만든 이유는 빛을 더 많이 확산시키기 위함이야.

불투명 전구의 안쪽을 만져보면 바깥쪽 보다 약간 거칠게 느껴질 거야. 유리전구 안쪽을 '플루오르화수소산(HF)'으로 녹여서 깎으면 불투명한 흰색 유리가 되거든. 필라멘트에서 나온 빛이 불투명한 거친 흰색 유리에 맞아 다시 빛을 골고루 확산하게 하는 것이지. 형광등의 형광물질과 다른 거야. 

"유리를 녹이는 건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인 줄 알았는데요. 열이 아닌 플루오르화수소산이 유리를 녹인다고요? 한번 실험해보고 싶어요!" 

글쎄…. 아빠는 말리고 싶은걸? 플루오르화수소산은 우리가 흔히 '불산'이라 부르는 아주 위험한 화학물질이야. 단 몇 방울만으로도 피부를 뚫고 사람의 뼈를 녹여버리거든.


위 일러스트는 책 속 배경을 가상의 공간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 본 연재는 12월 7일 출간 예정인 <사이언스 빌리지>(동아시아)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글 : 칼럼니스트 김병미,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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