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자유의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이 ‘압도적인 환상’은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양육(nurture) 곧, 사회화 과정에서도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왜 ‘완전한’ 혹은 ‘순수한’ 자유의지가 가능하거나 필요하다고 믿을까요? 그 이유는 도덕과 법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로부터 파생되는 ‘책임’ 개념이 무너지고 도덕철학이나 법철학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도덕이 성립하려면 마치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의 통념은 ‘과거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에 기반합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믿고, 그 사람의 선악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consciousness)이라 부르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인식’(perception) 활동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의식은 생각이나 판단, 자각, 인지 등과 같은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정신 활동을 의미합니다. 반면 인식은 환경을 자동으로 감지하고 해석하는 보다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입니다. 의식은 이 과정의 결과만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정보는 전체 인식의 백만 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식하는 나’의 역할은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 흔들릴까 두려워 자유의지 개념을 고수합니다.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1967~ )는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과거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에 근거하지만, 이 가정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의 생각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자유의지 관련 대중 통념은 ‘우리 각자가 과거에 했던 것을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가정은 과학의 엄격한 검증을 견디지 못했고, 따라서 자유의지 관련 대중 통념은 게임이 끝난 셈이다.”
해리스는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통제할 수 없는 원인의 불가피한 결과라면,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 또한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외부 원인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철저히 타율적이며, 타인의 의지에 감염된 ‘최면 상태’처럼 작동합니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우리의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의지보다 타인의 충동이나 욕망에 지배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인정과 평가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무의식적인 불안을 느낍니다.
이 맥락에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전제하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단호히 부정했습니다. 그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말하며, 자아의 허구성을 드러냈습니다. 생각은 의식적인 경험을 넘어 무의식의 작용에 속합니다.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로 재구성된 ‘상징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 상징계가 무의식을 형성합니다.
이 관점에서 '실재'(reality)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재가 존재하더라도, 그게 뭐든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재란 인간이 구성한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인간의 언어로 구성되어 상징계에 포함되기 전까지, 다시 말해 이름과 의미가 부여되기 전까지는 실제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이 내포된 상징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예컨대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이 말에는 ‘경제는 항상 성장해야 하며, 마이너스는 비정상이라 용납할 수 없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 언어는 경제 성장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유 자체를 가로막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상징 작용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결정하며, 때로는 사고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언어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사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들의 집합입니다. 이 개념들이 모여 문화를 이루고, 문화는 언어 같은 상징으로 이루어지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부터 삶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형성합니다. 상징이 문장을 이루고, 그 문장은 예컨대, ‘자유민주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체계다’와 같은 문화적인 신념으로 발전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조정합니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무의식이 일정한 질서를 지닌 체계라는 뜻이자, 동시에 언어 자체가 곧 무의식이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생각이 먼저 있고, 언어가 그걸 표현한다는 전통적인 관점과 달리, 언어는 오히려 주체를 형성하고 규정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드러난다”는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말뿐 아니라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지가 자유롭다는 믿음은 독단이며, 사회 현상과 우리 정신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코페르니쿠스나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이론을 처음 접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평가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 개념 또한 우리 사고에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유의지의 여부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윤리와 책임의 개념을 다시 성찰하도록 이끕니다.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1929)
그림에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mem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마그리트의 이 작품은 관객에게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사물 그 자체’인가, 아니면 사물을 가리키는 이미지와 언어의 조합에 불과한가.
이 그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믿음을 흔듭니다. 그림 속 파이프는 파이프의 ‘표상’일 뿐, 실제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파이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언어와 관습을 거쳐 구성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