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길들이기
17장 길들이기
“길들인다는 게 뭐야?”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거야.
생각해 봐, 네가 나를 길들이면 얼마나 멋질지.”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은 우리 자아가 하나의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안에 단 하나의 ‘나’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특정 임무를 함께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종종 각기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여러 구성원이 모인 ‘위원회’에 가깝습니다. 상충하는 욕망과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심리적인 모듈의 결합체가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119 구조대원이 전한 한 사례는 우리 심리가 여러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다리에 차를 세운 뒤, 마치 다시 돌아올 것처럼 차문을 잠그고 뛰어내립니다.” 사실 돌아올 일이 없기에 문을 잠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 ‘항상 문을 잠가야 한다’는 마음은 다른 마음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서로 독립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뉴스를 보며 주택 공급이 늘어나 집값이 안정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 집값이 떨어지는 건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나이는 천천히 들길 바라지만, 주말은 빨리 오길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일관된 존재라 믿지만, 사실상 서로 다른 욕망이 공존하는 다중 인격체에 가깝습니다.
현대 정신과학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 마음이 서로 충돌하는 여러 모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입증된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일관된 사람으로 믿거나, 남에게도 일관성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관되지 않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도 남에게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일관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의 이론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옳고 그름을 분별하거나, 그것을 판단할 자유의지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원초아(이드)와 자아(에고), 초자아(슈퍼에고)로 구성됩니다. 원초아는 본능적인 욕망과 연결되고, 자아는 이성과 상식을 대변합니다. 초자아는 사회에서 배운 규범을 내면화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죄책감을 낳는다고 보았습니다. 초자아는 자아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내면의 재판관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를 흔히 ‘양심’이라 부르며 자유의지의 표현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사회에서 형성된 초자아가 검열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결국 초자아란 부모나 교사, 미디어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된 훈육의 흔적이며, 사회 질서가 개인 마음속에 남긴 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형 신문사와 방송국은 어떤 사건을 뉴스로 다룰지, 어떤 관점에서 이를 국민에게 전달할지를 사실상 결정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대중 영화는 중산층이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 따라야 할 암묵적인 행동 규범을 제시합니다. 이런 콘텐츠는 가정의 파단이나 학교 폭력, 직장 내 권모술수, 성적 일탈 등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은 거의 예외 없이 가정과 직장, 학교가 요구하는 규칙을 어기는 개인에게 귀속됩니다. 가정을 소홀히 한 주부나, 일을 게을리 한 남자, 공부하지 않는 학생처럼, ‘일탈자’가 문제의 발단으로 설정됩니다. 반면 회사나 학교, 경찰 같은 제도는 대체로 자비롭고 공정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제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조차 구조적인 결함이 아니라, 몇몇 나쁜 개인의 일탈로 축소됩니다.
주류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독과점 광고 시장에 의해 유지되고 통제됩니다. 광고를 장악한 대형 광고회사가 여론 형성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와 관련해 소설가 조지 오웰(1903~50)은 『동물농장』(1945)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설’이라는 게 존재하며, 제대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고 여겨진다. 정설과 다른 의견이 법으로 금지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아는 이처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기보다 집단 속에서 사고합니다. 교육을 포함한 모든 훈육 제도는 학생보다는 가르치는 쪽, 즉 사회가 원하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합니다. 물론 언제나 학생을 위한다는 귀에 솔깃한 말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다루는 파업 논의가 이러한 훈육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교과서는 먼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파업’과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파업은 나쁘다’는 입장을 대립시킵니다. 이어 ‘시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선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하는 건 허용될 수 있다’는 절충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파업하지 말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파업은 시민 생활에 불편을 초래합니다. 파업의 효과는 바로 그 불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래, 격렬하게 파업해도 시민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호소는 쉽게 무시됩니다. 성숙한 시민사회란 이런 불편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고 감수하는 사회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 규범에 훈육된 초자아 때문에,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을 지지하기보다 자신의 불편한 출근길을 먼저 떠올리며 파업을 비난하곤 합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느끼는 도덕적인 의도나 양심의 가책이 반드시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건 단지 초자아의 기능에 불과하며, 초자아란 시대의 요구와 사회 훈육이 마음에 남긴 ‘흔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느끼는 양심의 목소리란 단지 시대가 만든 유산일 수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양심이라는 가면이 겉으로는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사회적인 요구를 내면화한 결과에 불과해, 절대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양심은 자명함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한다고 믿는다. 각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 소망이 ‘자기의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이 확신은 환상일 뿐이다.”
현대 뇌신경과학은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신체 표지’(somatic marker)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신체 표지는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판단을 내리는 무의식적인 ‘감정 기억’으로, 이 판단은 신체 표지에 저장되어 이후의 의사결정에 깊이 영향을 미칩니다. 뇌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1944~ )에 따르면, 신체 표지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장단점을 따져보기 전에 이미 일부 선택지를 배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신체 표지는 우리 몸에 ‘흔적’처럼 쌓이며, 의식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오래 저장합니다. 따라서 학습을 단지 의식적인 과정으로만 보는 건 오해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행동을 할 때 생긴 ‘감정 기억’의 상태입니다. 느낌이나 행위 자체는 마음속에서 나중에 일어나는 반향(反響)에 불과합니다. 감정 기억은 이러한 느낌과 행위의 결과로 형성되어, 우리 마음에 오래 남아 이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도 모르게 쌓이기에, 의식적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불교는 이 감정 기억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부릅니다. 아뢰야식은 행위의 결과로 생긴 ‘흔적’이 종자(種子)처럼 마음 깊이 남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다시 표현됩니다. 즉, 행위로 생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이 쌓였다가, 때가 되면 다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개인의 과거 업(業, 카르마 karma)뿐 아니라,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도 형성됩니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이 사회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의식은 사회의 질서, 권력, 규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수동적인 산물입니다. 결국 개인의 의식은 사회의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데카르트처럼 자신의 의식만 들여다봐선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내 삶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식적인 생각과 결단에는 무의식이 깊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생각과 결단의 본질,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내 안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불교 사상은 프로이트나 현대 뇌신경과학의 연구 결과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불교는 수천 년 전부터 사회에서 영향받은 아뢰야식이 마음 깊은 곳에 종자로 남아 있다가 다양한 자극에 따라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뢰야식은 삶의 모든 순간에 켜켜이 쌓이며, 이후 격렬하게 분출되거나, 때로는 조용히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