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의 원자와 세포

- 17장 길들이기

by 북다이제스터



불교에서 인상적인 건 아뢰야식 개념이 자기(self)를 가변적으로 이해하는 무아(無我) 사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나’는 주인처럼 명령을 내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흩어졌다 모이는 임시 상태에 불과합니다. 내 안에 확고한 ‘자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건 허구입니다.


아뢰야식이 심층에 내재하는 동안, 각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을 형성합니다. 이는 아뢰야식이 개별적인 경험을 오랜 시간 축적하며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환경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고, 그 경험이 습관으로 굳어져 매 순간의 판단과 행동을 이끕니다.


불교에 따르면, 우리는 뜻대로 살 수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자아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나의 느낌이나 생각, 의지 역시 사회나 문화,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나는 환경이 바뀔 때마다 늘 새롭게 변할 수 있습니다. 집착할 만한 절대적인 자아는 없습니다. 불교는 바로 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걸 해탈로 가는 지름길이라 말합니다.


무아는 불교 신자가 아닌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개인주의나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구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식 사고는 ‘스스로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기독교 역시 ‘개인의 신앙’(the cult of the individual)을 강조하며 안정된 개인 정체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전통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개별성이 실체가 아니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는 인간에게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가 있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사랑이나 박애 같은 이타적인 가치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자아가 실재한다고 믿는 한, 이기적인 행위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론과 윤리학이 과연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해 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자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아를 보호하거나 완성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넘어야 할 집착으로 봅니다. ‘나는 누구다’라는 자의식은 타인과 경계 지으며 만들어진 골치 아픈 문명의 산물입니다. 빈곤조차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불교는 안정적이고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무아라는 개념은 처음엔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를 삶의 원칙으로 삼을 때, 삶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믿음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아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다고 느끼는 ‘주체의 확실성’ 때문입니다. 신체의 유사성이나 연속성을 근거로 동일한 ‘나’를 상정하고, 그 위에서 무아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연속성에 묶어두면, 변화를 거부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아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고정된 본성이 있다고 믿는 한, 그 본성에 얽매여 변화를 거부하게 됩니다. 자의식을 줄이면, 우리는 비로소 세계와 새롭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말하는 무아의 핵심은 다음 우화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가다 버려진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한밤중에 귀신 하나가 시체를 메고 와 그의 앞에 던졌습니다. 잠시 뒤 또 다른 귀신이 나타나 “그 시체는 내 것인데 어찌 네가 메고 왔느냐?”며 먼저 온 귀신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온 귀신은 “내 것이니 내가 메고 왔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두 귀신은 시체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다투었습니다. 그때 먼저 온 귀신이 제안했습니다. “여기 인간이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을 들은 다른 귀신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은 고민했습니다. ‘사실을 말해도, 거짓을 말해도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결국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먼저 온 귀신이 메고 왔다.” 그러자 나중에 온 귀신이 화를 내며 그의 팔을 뽑아버렸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귀신이 시체의 팔을 떼어 붙이니 다시 멀쩡해졌습니다. 두 귀신은 이런 식으로 그의 두 팔과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시체의 것으로 바꾼 뒤, 원래 그의 몸을 모두 먹고 사라졌습니다.

혼자 남은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 몸은 모두 먹히고 시체의 몸으로 바뀌었으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다음날 그는 길을 떠나 목적지 근처에서 스님들을 만나 물었습니다. “내 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스님들이 도리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되묻자, 그는 “나도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소”라며 지난밤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들은 그가 무아(無我)를 깨달아 제도(濟度, 중생을 건져 내 생사 없는 열반에 이르게 함)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나’라는 실체가 없었다. 사대육신(四大六身)이 연기(緣起, 한 사건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의 결과로 보는 것)로 화합해 내 몸이라 여겼을 뿐, 이전이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수행 끝에 아라한(번뇌를 끊고, 이치를 깨달아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성자)이 되었습니다.


이 불교의 우화는 허황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 역시 비슷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원자와 세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신체 세포의 약 90퍼센트는 매년 교체되며, 대략 5년이면 몸 대부분이 완전히 새로 바뀝니다(뇌와 수정체 일부는 예외입니다).


신체 세포는 각기 다른 속도로 생성되고, 소멸하가기에 세포마다 나이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세포는 7~10년 사이 모두 교체됩니다. 가령 적혈구는 넉 달마다 전부 바뀌고, 심장은 매년 18퍼센트 정도가 재생되어, 우리 심장은 다섯 살이 채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은 1~2년, 뼈는 약 10년이면 모두 교체됩니다. 입속 미각 세포는 10일, 피부 세포는 39일마다 갱신됩니다. 뇌신경세포는 주로 신생아 시기에 만들어지지만, 대뇌 피질에선 새로운 신경세표가 자랍니다. 우리 몸은 갓 태어난 세포와 오래된 세포, 죽어가는 세포가 섞여 있지만, 비교적 갓 태어난 세포가 많은 편입니다.


우리 몸의 원자는 세포보다 더 짧은 주기로 교체됩니다. 우리는 엄청난 양의 몸 원자를 항상 흘리고 다니며 새 원자로 대체합니다. 가령 나트륨 원자는 1~2주면 절반이 바뀌고, 수소와 인도 비슷한 주기로 교체됩니다. 탄소 원자의 절반도 한두 달이면 다른 원자로 대체됩니다. 1년 안에 우리 몸의 98퍼센트 원자가 공기와 음식, 물을 통해 다른 원자로 대체됩니다.


우리 몸은 세포나 원자뿐 아니라, 공생하는 미생물에 의해서도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약 1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몸속과 피부에 사는 미생물 세포는 그보다 열 배나 많은 100조 개에 달합니다. 무게로 따지면 대략 1.3킬로그램으로, 우리 뇌의 무게와 비슷합니다. 인간 유전자는 약 2만 개인 데 반해, 우리 몸속 미생물의 유전자는 200만 개에서 2,000만 개에 이릅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99퍼센트 이상이 미생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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