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역사가 있는 까닭

- 1장 여성과 편견

by 북다이제스터




특정 시기나 장소에서 ‘다수가 옳다고 믿은’ 코르셋이나 전족, 할례, 순결과 같은 사례와 달리, 인간은 본성상 서로 비슷해 결국 그 본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장 베르동(1937~ )은 『중세의 쾌락』(1996)에서, 중세 유럽인들이 금욕을 강조한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과연 육체의 쾌락을 거부했는지, 아니 거부할 수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아자그’(asag)라는 풍습을 소개합니다.


아자그는 중세 프랑스 남부에서 행해지던 독특한 ‘시련’으로, 남성이 구애 의식 후 첫 키스를 나누기 전에 사랑하는 여성의 나신을 보는 의식입니다. 여성은 남성 옆에 알몸으로 눕습니다. 남성은 이 의식을 주도하는 여성 의사에 반(反)해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는 그가 여성을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르동은 중세 유럽이 육체보다 정신과 영혼을 중시했지만, 인간 본성인 욕망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항상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가 욕망을 조절합니다. 문화와 신념에 따라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가령 중세 유럽 수도원에는 생식 능력이 왕성한 남성들이 살았으나, 그들은 금욕과 순결을 요구받아 욕망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욕망이 특정 신념과 결합되면, 행동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성(性)을 죄와 동일시하거나, 적어도 죄로 이끄는 주요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이후 기독교 교리는 성적 욕망이 인간을 타락시키며, 신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남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을 질병처럼 취급했습니다. 3~4세기 서유럽에서 금욕 운동이 퍼지며 여성은 더욱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성적 금욕은 금욕주의의 핵심 덕목으로, 완전한 남성이 되려면 여성을 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랑은 경멸적인 의미가 되었고, 그 누구보다 수도사들은 여성을 멀리하기 위해 사막이나 숲으로 도피했습니다.


중세 초기 문헌에서 ‘사랑’(amor)은 지금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랑을 걷잡을 수 없는 육체적인 충동이자 악마가 자극한 욕망의 산물로 보아, 결국 파멸로 이끈다고 믿었습니다. 사랑은 자비심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감정이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이런 비합리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정신을 ‘리비도’(libido)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부부 사이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카리타스’(caritas)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애호나 친밀감, 우정, 감성적이고 헌신적인 믿음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오늘날 그 의미를 딱 맞게 번역하기는 어렵습니다.


단테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 청신체파(淸身體波) 시인들은 이런 사랑의 전통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신에게 다가가는 숭고한 존재로 찬미했습니다. 연인을 향한 사랑은 욕망을 내려놓고 영혼을 정화하는 길로 여겨졌습니다. 단테의 작품 세계도 뮤즈인 베아트리체를 향한 간절한 사랑과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 경험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지만, 진화심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직 유전자에만 좌우되지 않습니다. 인간 뇌의 가소성(환경과 학습에 따라 뇌세포가 계속 성장하거나 쇠퇴하는 성질)을 고려하면, 인간의 인식과 행동은 단순히 유전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신경생물학자 스티븐 로즈(1937~ )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대형동물과 달리 뇌 속 신경 연결이 거의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간 행동은 유전으로 제어되는 본능보다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습니다. 인간은 5만 년 전에 진화를 멈췄으며, 오늘날 우리의 모든 행위는 진화보다 학습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1994)를 쓴 시어도어 젤딘(1933~ )은 남녀 관계가 시대와 문화마다 매우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원시 시대부터 근대까지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할 때 반드시 성적인 관계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12세기 유럽 기사들은 자신이 숭배하는 여인에게 헌신했지만, 꼭 성적인 결합을 바라지는 않았다. 17세기까지 영국에서 결혼은 대개 이십 대 후반에 이뤄졌지만, 사생아 출생률은 3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는 피임이 보편화된 오늘날보다도 매우 낮은 수치다.”


젤딘은 중세 유럽의 아자그와 비슷한 번들(bundle)이라는 ‘시련’의 관습을 소개합니다. 번들은 구애하는 남성이 여성의 집에 초대되어, 침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관례입니다. 번들은 옷을 입은 채 서로 껴안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때로 여성은 허리까지 옷을 벗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순수한 애정 표현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서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번들은 연인끼리 응접실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로 여겨졌고, 무엇보다 따뜻해서 겨울철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번들은 주로 일요일 예배 후 이루어졌습니다. 이 풍습은 약혼자들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나 딸들과 ‘번들’하라고 남성 손님을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번들은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에서 널리 퍼졌고, 아프가니스탄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10세기 일본 남성 역시 육체 때문에 여성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벌거벗은 몸은 참으로 추악해 어떠한 매력도 없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자연스러운 치아조차 매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치아를 검게 칠해 감췄습니다. 오직 긴 머리만이 아름다움의 기준이었습니다. 여성의 매력은 기모노를 고르고 입는 감각이나, 향수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는 예술적인 솜씨에 달려있었습니다. 여성은 감정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간주되었으나, 남성이 여성에게 욕망을 느끼면 자제력을 잃은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됐습니다.


젤딘에 따르면, 남녀 간 신체 접촉이나 성행위가 친밀함의 상징이 된 건 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는 우리의 행동 대부분이 단지 ‘상호주관적인 실재’일 수 있다고 암시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18세기 이전 유럽에서조차 지금과 같은 사랑은 우발적인 일로 여겨, 그런 불안정한 남녀 결합을 꺼렸습니다. 사랑은 매우 부정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어, 남녀 관계에서 사랑이 우선시 되지 않았습니다. 중세 유럽 사회는 물론 로마법에서도 결혼의 목적은 자녀 출산이었고, 결혼할 남성은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입증하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사랑에도 역사가 있는 이유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경험은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취향 역시,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이나 광고 같은 미디어가 심어준 이미지로 재단되어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우리의 성적인 취향에 미디어의 영향이 깊이 스며있습니다.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 몸매는 풍만함이었습니다. 날씬함은 가난과 식량부족의 상징으로 여겨져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16~17세기 유럽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은 풍만함에 있었습니다. 루벤스(1577~1640)의 그림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날씬한 몸매가 미의 기준이 된 건 19세기 중반 중산층에서 시작되었지만, 최근에야 널리 퍼졌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구의 이미지는 대중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품는 가장 은밀한 성적 취향이나 사랑의 환상조차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인 사건’에 불과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샘에서 목욕하는 여인>(1868)



사실만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화가 쿠르베는 동시대 작품과는 전혀 다른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상화된 여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성 누드를 그렸습니다. 특히 펑퍼짐한 엉덩이를 강조한 그의 그림은 신화적인 이상미를 추구하던 당시의 미적 기준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않았습니다.




원시 사회에서 마르고 나약한 여성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경제적인 자산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남성은 결혼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나 일가친척이 주선한 맞선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남성이 여성과 결혼해 함께 일하면, 혼자 일할 때보다 더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혼인은 재산을 상속하거나,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고자 자녀를 낳고 키우기 위한 것이었고, 애정과는 상관없었습니다.


결혼은 사실상 상업적인 거래에 가까웠습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감정을 억누르고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앞세우는 게 더 이상할 수 있습니다. ‘원시인’이 오늘날 우리의 결혼 방식을 본다면, 왜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한평생 서로 옭아매며 사는지 설명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체스터필드 경(1694~1773)이 말했듯 “사랑의 기쁨은 순간이고, 입장은 우스꽝스럽고, 비용은 지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부분의 사회에서 결혼은 가족 간 매매혼이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을 둔 결혼이 가장 현명하고 건전한 방법이었습니다. 때로는 딸을 노동의 대가로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창세기 29:20>에서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간 일했습니다. 신랑은 결혼 예물이나 돈을 신부 집에 보내고, 신부 아버지는 그 대가로 혼수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매매혼의 흔적은 오늘날 결혼반지에 남아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할 남성이 돈으로 아내를 사고, 대금 지급 증표로 철제 반지를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결혼반지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혼인 또한 개인 의사보다 집안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부모는 비슷한 배경의 집안을 신중히 골라 혼인을 맺어주었습니다. 부부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이 비슷해 감정 갈등도 적었습니다.


조선 시대 남녀 집안은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서 혼인했으며, 남편이 처가에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처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혼인 후에도 여성이 자신의 성(性)씨를 유지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국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에 전족이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 여성의 지위는 남편의 애정이 아닌 집안에서 맡은 역할로 정해졌습니다. 이런 안정된 지위 덕분에 조선 여성은 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선 여성은 집안의 공동 운영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중매결혼이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는 인도인들조차 종종 중매결혼을 위해 귀국하는 일이 많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인도 사회가 여전히 이런 풍습을 유지하는 게 무척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는 당사자가 선택한 결혼을 ‘간다르마 결혼’이라 부르며, 이를 ‘욕망의 열매’로 낙인찍습니다. 이런 결혼이 허용은 되지만 존중받지는 못합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쉽게 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도 사회는 감정적인 선택보다 가족이 맺어준 결혼을 더 안정적이고 현명한 방식으로 여깁니다.


결혼은 단순히 젊은이들의 감정에게만 맡기기엔 곤란할 만큼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사랑이라는 불안정한 감정이 결혼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연예결혼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가 순간의 열정에 휩쓸려 결국 환멸과 상처로 끝날 결합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배우자를 정해줍니다.


여전히 오늘날 많은 문화권에서 결혼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계약일뿐 아니라 가족 간 거래이기도 합니다. 종교나 법으로 정해진 결혼 규범은 남녀 결합에 대한 기대를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신혼부부가 어느 가족과 함께 살지, 아니면 독립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릴지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한 이혼이나 사망 시 상속과 재산 분할까지 상세히 정합니다. 지참금이나 신부값 같은 형태로 부의 이전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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