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디테일에 있다

- 1장 여성과 편견

by 북다이제스터




서구 사회에서는 18세기부터 열애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인식이 생겨나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연인이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이 자연스러운 인간 성향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인류의 놀라운 발명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대상을 이상화하는 걸 의미합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강조되면서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다룬 소설이 대중화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사랑에 각인되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베르테르, 안나 카레니아처럼 사랑에 목숨을 건 주인공들이 문화사를 지배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죽어야 했던 이들은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던 사회에 맞선 반항아로 그려졌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그렇게 ‘개인’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90)는 『도덕감정론』(1759)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회가 결혼을 집안 어른들이 결정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왜 자유롭게 결혼하지 않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사랑이 야만인들 사이에서 용서받지 못할 유약함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하며, 남녀 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영국식 결혼이 최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유 시장을 옹호한 그가 개인의 자유 연예를 칭송한 건 놀랍지 않습니다. 동시에, 서구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그가 자유 결혼을 원주민의 ‘열등함’과 대비시켜 정당화한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달리 역사학자 존 보스웰(1947~94)은 오늘날의 낭만적인 사랑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은’ 현상인지 지적합니다. 낭만적인 사랑에 기반한 관계는 최근까지도 유럽에서 보편적이지 않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예외적인 시기입니다. 과거에는 낭만적인 사랑이 약점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질병처럼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사랑 인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주로 만남의 초기 단계에만 초점이 맞춰집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면, 오히려 사랑을 오해해 관계의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변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이 현실적인 부부 관계로 바뀌는 순간, 남는 건 프루스트(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에서 스완이 느낀 실망과 환멸뿐일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의 감정만으로 변하는 사랑 전체를 판단하는 건, 어쩌면 우리가 ‘원시인’보다 더 미성숙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감정에만 초점을 집중하기에,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도 이를 ‘망상’이라 비판했습니다.


“개인은 종(種)이 부여한 사명을 모른 채 행동한다. 사랑의 열정은 종에게 유리한 것을 개인에게도 가치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망상이다. 종의 목적이 달성되면 이 기만은 곧 사라진다. 자연은 번식을 위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지만, 번식이 끝나면 그 아름다움도 사라진다. 결국 개인은 자신이 종의 의지에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에서 두드러진다.”


강렬한 낭만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차분한 애착으로 바뀌거나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 변화는 대개 4년쯤 걸리며, 흥미롭게도 아이가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 없이 자랄 수 있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회에서 이혼율은 결혼 4~6년 차에 가장 높습니다. 사회는 부모의 자녀 양육을 보장하기 위해 낭만적인 사랑을 만들어냈지만, 그 감정은 생식 성공에 필요한 기간까지만 지속됩니다.


이제 낭만적인 사랑도 변하고 있습니다.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왜 결혼해야 하는지를 자신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평균 결혼 연령과 미혼율, 이혼율 모두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혼이 어렵거나 불가능했지만, 이젠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이들도 혼인 생활이 원만하지 않으면 삶의 동반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항상 같은 애정 유형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가정하지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이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관계와 애정 유형이 너무 다양해, 단일한 공통 속성으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사랑’이라는 말이나 관념을 가진 민족이 드물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었지만, 남녀 간 특별한 감정을 뜻하는 개념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자 ‘애’(愛)는 원래 고전 용례에서 ‘아끼는 마음’, 가령 백성을 아끼는 마음처럼 포괄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이전 자주 쓰인 ‘이로’[色]는 주로 게이샤와의 관계를 뜻해 오늘날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욕망이나 바라볼 때 느끼는 행복, 이해받는 느낌, 성적인 매력, 상대에게 느끼는 감탄, 각별한 감정, 배타적인 의리, 보호하고 싶은 소망 같은 다양한 감정이 얽힌 현상입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이 사랑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감정을 제외하면, 사랑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개념 하나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실체를 다루는 생물학에서도 단일 개념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꽃’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은 대략 26만 종에 이르며, 형태와 크기가 매우 다양합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은 100만 종이 넘습니다. 딱정벌레만 해도 4만 5,000종이 넘고, 지금도 매일 새로운 종이 발견됩니다. 이처럼 생물은 너무 다양해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작가 룰루 밀러의 책 제목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도 이를 암시합니다.


자연과 인간 삶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추상적인 무언가로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과 인생은 지극히 넓고 깊으며, 상황과 맥락의 연속입니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오늘을 산다’는 말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인생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며, 심지어 우리가 보는 건 언제나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특정한 맥락에 ‘한정’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바람직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 시대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상호주관적인 실재’를 반영한 인생만 있을 뿐입니다.


정치경제학자 칼 마르크스(1818~83)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사회적인 관계들의 총합”이라 말했습니다. 인간 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는 “모든 역사는 인간 본성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한 개인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는 사회 내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됩니다. 어떤 시기에 ‘본능’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다른 시기에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가 속한 사회와 시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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