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가족과 식인
아이는 하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일본 전통의 사무라이 가문에서는 사내아이가 어릴 때 낯선 가정으로 보내져 남의집살이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는 궁핍한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도, 대부분 아이는 7~8세 무렵이면 집을 떠나 남의 집에서 가사를 돕거나 도제로 들어갔습니다. 소수만 집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집안 재산 규모와 무관했습니다. 거의 모든 가정이 자녀를 남의 집에 보내고, 다른 집 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부모가 직접 가르칠 일을 굳이 다른 집에서 배우도록 했다는 사실은 낯선 관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집을 떠난 아이들은 다시 친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친부모, 특히 엄마가 모성애 때문에 아이를 애타게 그리워했다는 기록은 매우 드뭅니다. 남의 집에서 아이는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했고, 주인을 ‘잘 섬기는 것’이 기본 덕목이었습니다. 시종으로서 식탁을 차리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주인을 따라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봉사’ 개념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는 건 굴욕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부부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감정보다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에 더 크게 좌우됐습니다. 물론 인류는 태초부터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온 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늘 사랑과 따뜻한 안식처, 소중한 추억을 의미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전 유럽만 해도 가족 구성원 간 서로에게 정서적인 친밀감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친밀감 자체가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느끼는 방식은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믿는 모성애조차, 많은 사회학자는 모성애가 과연 본래부터 존재했는지, 아니면 근대에 만들어진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산업화 이전, 아이는 욕구 없는 불완전한 ‘작은 성인’으로 취급되어, 부모는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오히려 아이라는 ‘짐’에서 벗어날 방법만 수없이 고민하곤 헸습니다.
예컨대 소설가 발자크(1799~1850)는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태어나자마자 먼 곳의 보모에게 보내졌고, 4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7세부터 13세까지 수도회 기숙학교에 보내져, 6년간 방학 때조차 한 번도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선 이러한 사례는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도시 외곽의 유모에게 맡겨졌습니다. 유모 중에는 매춘부나 천하고 병약한 여성도 있었지만, 엄마는 유모를 직접 만나보지 않았고, 아빠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유모의 건강 상태나 젖이 나오는지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고, 처음 만난 농부 여성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평민 이상 계층의 여성은 모유 수유를 품위 없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이는 건 잘 살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체면과 위신을 유지하고자 모유 수유를 꺼렸습니다.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은 즐겁거나, 세련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지나치게 아끼거나, 자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희생하는 건 어리석고 미련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17세기 이전 우리나라에서도 자식이나 남편에게 헌신하는 현모양처를 어머니에게 기대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현모양처는 주로 며느리라는 역할에 기반을 둡니다. 곧, 시집살이를 전제로 한 ‘훌륭한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를 뜻합니다. 그런데 17세기 이전만 해도 조선 여성은 결혼해도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혼인 관행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신혼살림을 처가에서 시작하고 신랑은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예컨대 율곡 이이는 강릉에서 태어나 여섯 살이 돼서야 서울로 왔을 만큼, 신사임당은 혼인 후에도 대부분 강릉 친정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딸도 본가의 제사를 지내며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아, 며느리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습니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기억되지만, 실제 삶은 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재능과 기호에 몰두한 예술가였습니다. 율곡은 어머니의 포도 그림이 “세상에 견줄 데 없다”고 했는데, 이는 신사임당이 화가로서 크게 성공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자기 능력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신사임당은 자신에게 몰두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신사임당은 율곡의 교육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해준 것도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유럽이나 우리나라의 양육 풍습이 지금 우리 눈에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부모들이 더 솔직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 역할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노예의 삶에 비견될 만큼 힘든 일입니다. 현대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자녀는 반드시 부모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의 행복감은 점차 낮아지고,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 가장 크게 떨어집니다. 부모 행복감은 막내가 독립해 집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녀 낳기 전 수준으로 서서히 회복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 부모는 노년기에 접어들어 자신이 자녀를 키웠던 기억을 되돌아보며 가장 큰 행복을 느낍니다.
모성이 정말 타고난 본성이라면, 어머니가 어떻게 어린 자녀와 일부러 오랫동안 떨어져 지낼 수 있을까요? 또 여러 자녀 중 유독 한 아이만 더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왜 딸보다는 아들을, 둘째보다는 첫째를 더 아낄 수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어머니는 흔히 재산을 혼자 물려받을 장남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보이곤 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장남에게 기대어 살아야 했기에,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18세기 중반, 유럽인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이미지와 역할, 그리고 그 중요성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성’(母性)이라는 말에 ‘애’(愛)라는 단어가 결합되며, 어머니의 사랑은 마치 천성처럼 여겨지게 됐습니다. 당시 인구는 곧 국가의 부(富)로 간주되었고, 아기들의 생존이 새로운 지상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유럽 각국의 군사력은 인구 규모에 기반한 병력 동원에 달려있었습니다. 출생률과 영아 사망률이 군사력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징집된 병사의 체력이나 기초 교육 수준도 점점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국가의 주요 관심사가 됐습니다. 예전엔 사망률이 높아 부모가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젖먹이의 생명조차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엄마가 직접 젖을 먹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의 심리적인 유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모성애’라는 개념을 모든 어머니에게 주입하며, 아이의 생명과 교육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근대 각국에서 영아 사망률이 낮아진 건 단순히 보건의료 기술의 발전 때문이 아닙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대하는 인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성애는 타고난 생물학적인 본능이 아니라, 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의 산물입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거나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가 해낸 일이다’ 같은 말은, 여성이 어머니 역할을 잘 수행할 때에만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동’과 ‘모성’의 창조는 국가와 자본주의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의 성공은 어머니에게 달렸다’는 빈 서판(blank slate) 이론과 함께 확산되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보지 말고, 정신 발달에 맞춰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들은 자녀의 인생이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는 부담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정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애정이 강조되는 정서적인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공부에 관심을 두고, 항상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사회에서는 장자 선호가 뚜렷했지만, 근대로 들어오며 가족 구성원 간의 정서적인 친밀감이 커지면서 모든 자녀를 고루 사랑하는 새로운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태도는 예전엔 거의 없던 일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이의 역할도 달라졌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공장에 보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착취당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커지자 아동노동은 법으로 금지되고, 의무교육이 도입됐습니다.
아이들이 성인 노동 현장에서 벗어나게 되자, 유년기와 성년기 사이에 ‘청소년기’라는 새로운 단계가 생겼습니다. 청소년기 개념은 1905년 심리학자 스탠리 홀(1844~1924)이 처음 ‘발명’했습니다. 그는 청소년기를 “이상주의가 꽃피고, 권위에 반항하며, 난관과 갈등이 불가피한 시기”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청소년기의 문제를 문화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산업자본주의 이전엔 아이도 가정의 생산을 돕는 존재였기에, 부모가 직접 훈육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경제가 점차 안정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부모의 훈육 방식은 아이들에게 점점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 사이에서는 부모 세대와 단절된 ‘또래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모를 본보기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구세대로 여기고, 그들의 관심사는 미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아닌 또래에게서 배우려 합니다. 구세대의 가치를 거부하는 청소년기는 점차 일탈과 폭력적인 행동이 두드러지는 시기로 변했고, 결국 반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