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 이유

- 2장 가족과 식인

by 북다이제스터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BC 550~486)는 관습에 따라 돌아가신 부모를 화장하는 그리스인에게 제안했습니다. “당신이 죽은 부모의 시신을 먹으면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소.” 이 말을 들은 그리스인은 사색이 되어, 억만금을 줘도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번엔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먹는 것이 관습인 칼라티인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이 죽은 부모의 시신을 화장하면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소.” 그 역시 놀라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식인의 흔적은 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납니다. 당시 인류는 주로 사냥을 했지만, 때때로 서로를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가령 세르비아 동굴에서는 불에 타 갈라진 인간 뼈가, 베이징 근교 동굴에서는 인간 골수를 먹기 위해 쪼개진 뼈가 발견됐습니다. 이는 단순한 영양 섭취라기보다, 의식이나 축제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우리는 식인을 야만적이고 인간 이하의 행위로 봅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식인은 단순히 동족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른 포유동물은 인간처럼 규칙적이고 대규모로 동족을 먹지 않습니다. 이는 식인이 ‘자연스럽게’ 생긴 게 아니라, ‘생각’해 낸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4,000년 동안 존재한 100여 개 사회를 분석해, 식인 풍습이 있던 사회가 34퍼센트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식인에 대한 혐오는, 생각만큼 보편적인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식인은 꽤 많은 지역에서 널리 퍼진 문화였습니다.


식인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식인을 했을까요? 예컨대, 기원전 206년 중국 진나라 멸망 이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5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큰 전투만 70회, 작은 전투가 40회에 달했습니다. 전쟁 속에서 백성들은 일터를 잃고 대기근에 시달리며, 결국 서로를 잡아먹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기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5세기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서고트인이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올 때 전염병과 대기근이 겹쳤습니다. 그들은 인육으로 연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죽여 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체를 먹는 데 익숙해지자, 살아있는 사람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고 에스파냐 주교 히다티우스(400~469?)는 기록했습니다.


11세기 프랑스에선 연이은 홍수로 대기근이 닥치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사학자 로둘푸스 글라베르(985~1047)는 기록했습니다.


“극심한 기아로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 여행자는 자신보다 건장한 이들에게 유괴돼 사지가 절단된 채 불에 구워졌다. 기근을 피해 떠돌던 이들은 자신을 환대하던 자들에게 갑자기 살해돼 먹잇감이 됐다. 아이들은 과일이나 달걀로 유인되어 으슥한 곳에서 잡아먹혔다. 시체는 도굴돼 허기를 채우는 데 쓰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보스턴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 이른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는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102명 중 실제 청교도는 3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보다 앞선 1607년, 유럽인 104명이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먼저 도착했지만, 이들은 미국 건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합니다. 부랑자나 범죄자, 빈민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609년부터 1610년 사이에 제임스타운 이주민들은 ‘기아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질병과 가뭄으로 기근이 들고 인디언 공격까지 겹치며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극심한 배고픔에 일부 이주민은 말을 먹기 시작했고, 이어 개와 고양이, 쥐, 뱀을 잡아먹다가 결국 식인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헌에는 “극심한 허기로 영국인 무덤이든 인디언 무덤이든 가리지 않고 파헤쳐, 자연이 혐오할 만한 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로는, 어느 남편이 잠든 아내를 죽여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말끔히 사라질 때까지 식량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2013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버지니아주 제임스포트의 쓰레기장에서 400년 전 14세 소녀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머리뼈에는 도살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마와 뒤편에 찍히고 잘린 자국이 여러 곳 있으며, 뇌를 꺼내려 구멍을 낸 흔적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혀와 얼굴 조직도 제거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절단면에 남은 ‘주저한 흔적’으로 미뤄, 도살자는 전문 도축업자가 아닌 생존자, 특히 다수였던 여성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1610년 봄, 델라웨어 경(1576~1618)이 영국에서 식량을 가져오며 굶주림은 끝났지만, 정착민 중 살아남은 자는 60명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대기근이나 전쟁 같은 재해가 아니더라도, 사고로 생존자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대개 먼저 숨진 이의 시신을 먹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1972년 우루과이 대학 럭비팀을 태운 소형 비행기가 안데스산맥에 추락했습니다. 탑승객 45명 중 29명이 숨졌고, 생존자 16명은 75일간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식인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루과이 가톨릭 대주교는 생존자를 비난하지 않고 사망자의 명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유족들 역시 이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의 습작품(1819)



이 그림은 제리코가 1824년 발표한 원작 <메두사호의 뗏목>의 습작품입니다. 원작에는 뗏목 위 시체만 등장하지만, 이 습작에는 식인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1816년 7월 2일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는 세네갈 식민지 개척을 위해 항해하던 중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승객 400명 중 149명은 구명보트에 타지 못해 급히 뗏목을 만들고 표류하게 됐습니다. 폭풍을 만난 뗏목은 곧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기아와 탈수, 질병, 난동, 광기, 살인, 자살, 급기야 식인까지 벌어졌습니다. 13일 후 구조됐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근이나 전쟁, 사고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식인을 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랬습니다. 이세도네스인(기원전 9~4세기 유라시아 스텝지역 스키타이 북쪽에 살던 일족)은 죽은 아버지의 살을 잘게 썰어 양이나 염소 고기와 섞어 먹었습니다. 이처럼 일부 사회는 자기 부족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족내 식인’이라 부르는데, 그 형태는 다양합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은 시신을 장작불에 태운 뒤, 남은 뼛조각을 수습해 가루로 만들어 친척이 바나나 죽에 섞어 먹습니다. 반면, 파라과이의 구아야키족은 시신을 잘라서 굽습니다. 가족을 제외한 부족 전체가 종려나무 수액에 곁들여 먹습니다. 뼈는 잘라서 불태웁니다.


파푸아뉴기니의 오로카이바족은 전사한 이를 기리며 ‘영혼을 붙잡는’ 의식의 일환으로 식인을 했습니다. 뉴기니의 후아족은 생명의 원천이라 여겨지는 누(Nu)를 보존하고자 죽은 자를 먹었습니다. 또한 뉴기니 고지대의 기미족 여성들은 생식 능력을 회복하고 사내아이를 낳기 위해 죽은 남성을 먹었습니다.


죽은 자를 먹는 장례 의식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합니다. 이런 사회에선 식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고 믿었습니다. 이른바 장례 ‘만찬’은 종교적인 일체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고인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믿음(가령 용감한 사람의 심장을 먹으면 그 용기가 내 것이 된다는 믿음)이나, 고인의 살이 산 자들을 은유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신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식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더라도 강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를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하거나, 고인과의 결합(고인과 하나가 되어 그 누구도 고인과 나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상징), 사랑의 표현 등은 모든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존중받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에 대한 존경은 문화마다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반면, 남미의 투피-구아라니족과 카리브족은 전쟁 포로를 처형한 뒤 의례적으로 먹었습니다. 아즈텍 문명도 수십만 명을 식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시작해 인신 공양과 식인으로 이어지는 문화 풍습을 만들었습니다. 식인 대상은 주로 전쟁 포로였습니다. 아즈텍 군대는 식인할 포로를 산 채로 잡아오기 위해, 적군이 항복하기 전 너무 많이 죽이지 않도록 맹공 퍼붓기를 종종 삼갈 정도였습니다.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는 신에게 제물로 바친 시신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쉽게 가파르게 설계됐습니다. 성직자는 시신을 수습해 사람들에게 인육으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들의 식인 풍습은 단지 겉치레로 시늉만 하던 종교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즈텍 사람들을 쉽게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 인류 또한 살육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명인’은 오히려 아즈텍인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원시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인 자유를 달성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이 상상조차 못 할 규모로 전쟁과 학살을 저지릅니다. 우리의 야만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극단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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